항목 ID | GC02400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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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後期義兵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of Middle-Late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희곤 |
[정의]
1904년부터 1909년 말까지 안동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던 의병 항쟁.
[개설]
중기 의병으로 구분되는 시기는 1904년부터 1907년 7월 말까지이다.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맺어진 제1차 한일협약은 조선을 준 식민지 상태로 빠뜨렸고,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졌다는 소식에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나섰다.
후기 의병으로 구분되는 시기는 일본이 한국군을 해산하는 1907년 8월 1일부터 1909년 말까지이다. 중기 의병을 계승한 후기 의병은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에 대한 항거로 일어났다. 여기에는 해산 군인·유림·농민·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이 참가하여 전면적인 항일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중후기 의병에서 활약한 안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이상룡(李相龍)·박인화(朴仁和)·배선한(裵善翰)·류시연(柳時淵) 등이 있다.
[활동]
이상룡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매제 박경종(朴慶鍾, 영해 출신)과 함께 1만 금을 마련하여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와도 연대하여 대규모 의병 항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08년 가야산 의병이 실패로 끝나 버리자 계몽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군사력 양성에 중점을 둔 인력 양성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박인화는 박처사라고도 불리는 안동 출신 인물로 1905년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예안·안동·진보·영양 등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면서 류시연 의진 및 신돌석 의진과 연합하여 왕성한 모습을 보였으나 1908년 5월 3일 불행하게도 밀정에 의해 살해되었다. 박인화의 부대원으로는 권계홍(權桂洪)·김암회(金岩回)·김우철(金又鐵) 등이 있다. 배선한은 임동면 출신으로 23세가 되던 1906년 음력 3월, 신돌석 의진에 참가하여 의병들과 함께 영양과 청송을 공격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많은 무기를 빼앗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류시연은 임동면 고천리 출신으로 1896년 권세연이 이끌던 안동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다시 의병으로 나서 이듬해 봄 경주 분황사에서 여러 지역 의병장들과 모임을 갖고 그 자리에서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 후에는 신돌석·김성운 등과 손잡고 안동·영양·청송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류시연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으로는 김호락(金浩洛)이 있다. 이들 외에도 안동 출신의 김수락·강재천·권용길·김주봉·남준이가 작은 규모의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의의 및 평가]
안동의병은 전기(갑오의병·을미의병)와 달리 다른 지역에 비해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전기 의병을 이끌었던 유림들은 은거에 들어갔고, 그 제자들은 의병보다는 계몽 운동으로 전환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협동학교를 세우고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이 시기의 대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