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2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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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敎 |
영어공식명칭 | Heunggyo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흥용 |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 있는 자연마을.
[개설]
흥교(興敎)는 흥교사(興敎寺)가 있었던 동네로 강원도 영월군 남면 조전리,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 있는 ‘흥교사지’에는 신라 때에 창건된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이 있었다.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弓裔)가 세달사로 출가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궁예는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이름을 선종이라 하였다[弓裔便去世達寺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自號善宗].”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흥교사가 세달사임을 밝혀 주는 내용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에 “옛날 서라벌이 수도였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장사(莊舍)[농장]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지리지에 의하면 명주에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내생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昔新羅爲京師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柰李郡 按地理志 溟州無柰李郡唯有柰城郡 本柰生郡今寧越].”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궁예는 원주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가 세력을 키운 뒤 영월, 평창, 진부, 강릉을 정복하고, 철원을 도읍지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다.
영월 태화산 흥교사에 고려 시대 ‘흥교사 충희선사비(興敎寺冲曦禪師碑)’가 있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전한다. 일부 학자들은 ‘흥교사 충희선사비’의 흥교사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는 흥교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비는 완전히 파손되었고 1190년(명종 20)에 세웠다는 비석 조각의 탁본이 전할 뿐이다. 비문은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인 최선(崔詵)이 어명에 의하여 기문(記文)을 지었다. 승통을 지낸 충희의 제자 221명의 이름을 왼편에 기록하였다. 충희선사(冲曦禪師)[?~1183]는 고려 17대 인종의 넷째 아들로서 맏형은 18대 의종(毅宗)이고, 셋째 형이 19대 명종(明宗)이고, 동생은 20대 신종(神宗)이다. 충희선사는 국가로부터 원경국사(元敬國師)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동안 흥교사지 발굴 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상’과 ‘청동여래좌상’, 두 마리의 용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는 암막새·연꽃무뉘의 수막새·청자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흥교(興敎)’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막새도 발굴되었다. 또 세(世) 자와 달(達) 자가 돋을새김된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흥교사에서 공양미를 씻을 때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퉁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명칭 유래]
흥교는 후고구려를 세운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가 승려로 있었던 흥교사가 있었으므로 ‘흥교’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흥교가 있는 흥월리는 영월군 남면에 소속되었으나 1973년 7월에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월군 영월읍에 편입되었다. 흥교는 정양리의 잠수교를 지나 태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달이말의 신재원 집 대들보에 함풍원년(咸豊元年)[중국 청나라의 연호로 1851년(철종 2)]이라고 써 있을 정도로 뿌리가 있는 마을이다.
[자연환경]
흥교는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태백산 줄기인 내지산맥으로 연결된 해발 1,027m의 태화산 자락에 형성된 마을이다. 영월 사람들은 태화산을 화산이라고 부르는데, 태화산 정상에서 남쪽으로는 소백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황]
흥교는 마을 곳곳에 부도나 고려청자 파편, 석탑 조각들이 널려 있다. 1970년대는 50여 가구가 살았으나, 1970년대 화전 정리 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2021년 현재는 흥교 태화산 농장을 중심으로 10여 가구가 복숭아 농사와 콩, 옥수수, 배추, 들깨 등의 밭 작물을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