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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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宗休 |
영어공식명칭 | Park Jonghyu |
이칭/별칭 | 원팔(元八),치용(稚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희근 |
[정의]
조선 후기 영월부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박종휴(朴宗休)[1788~?]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원팔(元八)·치용(稚容)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필석(朴弼奭)이고, 할아버지는 박사린(朴師麟)이다. 친아버지는 박심원(朴心源)이고, 문중의 종손인 박영원(朴永源)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박종휴는 1788년(정조 12)에 태어났다. 1816년(순조 16) 추도기과(秋到記科) 강경(講經)에서 수석을 차지한 뒤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835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1846년에는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박종휴는 영월부사로 재직 중이던 1850년(철종 1) 영월 지역의 토지가 척박한 데다가 거듭 흉년이 들어 떠도는 백성이 많아지자 환곡의 포탈과 군오(軍伍)의 결원에 따른 폐해가 남아 있는 백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이를 시정하여 달라고 상소하였다. 박종휴의 상소로 영월부의 조세 3,900여 석이 탕감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852년 사간원대사간에 다시 임명된 박종휴는 양전 사업이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아서 삼정(三政)[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폐단이 심각하여졌다고 건의하였다. 1853년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철종을 모시고 창릉(昌陵)에 참배하였고, 이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낸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 1856년 박종휴는 재차 사간원대사간으로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