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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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이칭/별칭 | 역사 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방기철 |
[정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이후 강원도 영월군의 역사.
[개설]
인간의 역사는 선사 시대,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원사 시대[protohistory], 역사 시대로 구분된다. 역사 시대는 문자로 쓰여진 기록에 의하여 과거를 알 수 있는 시대를 가리킨다. 영월 지역의 경우 삼국 시대, 후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와 현대가 역사 시대에 해당한다.
[삼국 시대]
3~5세기 영월은 백제에 속하였고, 5세기 이후에는 고구려에 속하면서 내생군(奈生郡)으로 불렸다. 551년에는 신라가 내생군을 차지하였다. 삼국이 순차적으로 영월을 확보하였다는 사실은 이 시기 영월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려 준다. 실제로 고구려는 왕검성(王儉城)을 남진 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신라는 왕검성을 개축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양산성(正陽山城)을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남북국 시대]
676년(문무왕 16) 영월에 군사 조직인 내생군삼천당(奈生郡三千幢)이 설치되었다. 남북국 시대에도 영월은 군사적 거점으로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687년(신문왕 7)에는 지금의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서주(河西州)의 내생군에 속하였다. 757년(경덕왕 16) 하서주가 명주(溟州)로 개편될 때 명칭이 내생군에서 내성군(奈城郡)으로 바뀌었다. 당시 내성군은 지금의 주천면(酒泉面)인 주천현, 단양군(丹陽郡) 영춘면(永春面)인 자춘현(子春縣), 평창읍(平昌邑)인 백오현(白烏縣)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 영월에 9산선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 개창되었다. 이로 보아 남북국 시대 영월에는 불교사상과 문화가 크게 확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후삼국 시대]
후삼국 시대 영월 지역은 궁예(弓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궁예가 출가하였던 세달사는 영월에 위치한 흥교사(興敎寺)였다. 양길(梁吉)의 부하가 된 궁예는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삼고, 영월·평창(平昌)·울진(蔚珍) 등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세력을 넓혔다. 양길에게 독립한 후 궁예는 영월·평창·정선(旌善)·삼척(三陟), 강릉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확보하였다. 901년 궁예는 송악(松岳)을 근거지로 고려를 건국하였지만, 918년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영월 지역은 왕건의 영향에 놓였다.
[고려 시대]
995년(성종 14)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영월 지역은 중원도(中原道)에 속하였고, 현종 대 주천현(酒泉縣)이 폐지되면서 원주에 이속되었다. 5도 양계제가 실시되면서는 양광도에 편입되었다. 1167년(의종 21) 내성군을 폐하고 영월군(寧越郡)으로 개칭되어, 영월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였다. 이 시기 영월은 원주의 속현이었던 만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1372년(공민왕 21) 영월 출신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중국에서 환관으로 공을 세우자 영월군으로 승격시키고, 지군사(知郡事)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고려 시대 영월은 거란[契丹], 몽골[蒙古], 합단적(哈丹賊), 왜구(倭寇) 등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 시대]
1399년(정종 원년) 영월은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고, 원주진에 소속되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 개편 때 지방관이 지군사에서 군수(郡守)로 바뀌었다. 1698년(숙종 24) 노산군(魯山君)을 단종(端宗)으로 노산군의 묘를 장릉(莊陵)으로 추봉하면서 부(府)로 승격되었고, 지방관도 종3품의 부사(府使)로 바뀌었다. 1398년(태조 7) 영월에 향교가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1685년(숙종 11)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는데, 1699년 ‘창절(彰節)’이란 이름이 사액되었다. 영월에는 보안찰방(保安察訪) 소속하에 양연역(楊淵驛)과 연평역(延平驛), 제덕원(濟德院)과 용정원(龍井院)이 있었고, 후진(後津)과 밀적포(密積浦)라는 진과 포가 있었다.
[근대]
1895년(고종 32) 전국을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을 때 영월은 도호부(都護府)에서 군(郡)으로 격하되어 충주부에 속하였고, 부내면(府內面)은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전국이 13도 7부 1목 331군제로 개편되었는데, 영월은 충주부에서 다시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1905년 원주군 관할 주천현(酒泉縣)을 영월군으로 이속하였는데, 주천강을 중심으로 원주 쪽에서 왼쪽을 좌변면(左邊面), 오른쪽을 우변면(右邊面)이라 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선 을미의병(乙未義兵) 봉기 시 제천의진(堤川義陣)은 영월에서 시작되었고, 정미의병 당시 영월은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영월군은 8면 57개 정(町)과 리(里)로 편성되었다. 일제 강점기 영월에서는 시금광·철광·금은아연광 등의 광업이 성행하였고, 1937년 영월발전소를 설립하여 전력 생산을 시작하였다. 영월 지역도 일제에 의한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었지만, 미국은 9월 19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을 설치하여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945년 10월 28일 46군정중대가 영월 지역을 관할하였다. 1946년 1월 춘천에 제100군정청[서부군정청]이 설치되었는데, 제100군정청은 영월과 함께 춘천·홍천·원주·평창·횡성 등을 관할하였다. 이 시기 영월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심하여, 좌익 유격대인 빨치산과 토벌대의 충돌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영월은 1950년 7월 7일 북한군의 점령하에 놓였다가, 9월 30일 수복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1951년 1월 3일 영월은 소개령이 내려졌고, 3월 24일 다시 수복되었다. 영월화력발전소와 중석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영월을 두고 남북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영월은 폐허가 되었지만, 석탄 등의 지하자원이 개발되면서 에너지원 공급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폐광 및 석탄의 감산 등으로 영월의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인구 유출로 인구가 감소하는 등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폐광으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2005년부터 박물관 고을 육성 사업을 추진하였다. 2008년 12월 영월은 박물관 고을 특구로 지정되었고, 박물관 고을 육성 사업은 2009년 신 활력 사업 우수 모델로 선정되었다. 2010년 5월 리조트 동강시스타가 완공되었고, 2018년에는 드론전용비행시험장이 건립되는 등 영월은 다양한 방면으로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