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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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越 - 民俗文化 |
영어공식명칭 | Yeongwol Seopdari Minsok-munhwa|Seopdari Folk Culture in Yeongwol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승은 |
[정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서 전승되는 전통문화 자원.
[개설]
과거에는 강이 있는 곳이라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섶다리는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한 교량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2000년대 들어 몇몇 지역에서 섶다리를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영월군의 섶다리이다. 특히 영월군의 섶다리는 그 기원이 단종의 영월 유배 및 죽음이라는 애달픈 역사와도 관련이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섶다리 놓는 법]
섶다리는 섶나무[잎나무, 소나무 등]를 엮어서 만든 다리로 정의할 수 있다. 동강, 서강을 비롯하여 강이 가까운 영월 지역에서는 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섶다리를 놓곤 하였다. 섶다리를 만드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물에 강한 물버들나무나 소나무를 와이(Y) 자 모양의 다릿기둥으로 삼고 소나무나 참나무 머기미[다릿발을 연결하는 보]를 끼운다. 그다음으로, 고정된 다릿기둥 위로 ‘널래’라는 긴 나무를 상판으로 올린다. 솔가지, 잣나무 섶 등을 널래 위에 얹고 흙을 덮어 고정한다. 특이한 점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도끼와 끌로만 기둥과 들보를 맞춘다는 것이다. 다리를 놓을 때는 섶다리 세우는 방법을 알고 있는 노인들과 장정 등 스물댓 명이 모여 꼬박 이삼일 정도 작업한다. 섶다리는 주로 강물의 양이 적어지고 강폭이 줄어드는 늦가을에 놓았다가 겨울을 지나 이듬해 장마에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하였다. 때로는 장마철이 되기 전에 섶다리를 미리 철거하여 주요 목재들을 수습하여 두었다가 이듬해 다시 사용하기도 하였다.
[단종을 기리는 주천강 쌍섶다리]
현재 영월에서 섶다리를 볼 수 있는 장소는 주천면의 주천리 주천강변과 판운리 평창강변, 두 곳이다. 동강과 서강을 끼고 있는 영월의 특성상 섶다리는 예부터 주민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것이었는데, 주천강 섶다리는 쌍다리라는 점이 독특하며 이러한 특징은 단종의 유배와 죽음, 그 이후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임금의 자리를 넘겨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이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연이은 복위 도모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단종 또한 복위 운동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고 끝내 1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단종이 다시 임금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을 훌쩍 넘긴 숙종(肅宗) 대에 이르러서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은 단종의 죽음을 자결로 기록하고 있고, 종친록(宗親錄)에서도 그 이름을 삭제하고 경상북도 성주군 법림산에 두었던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을 철거하는 등 철저히 역모에 가담한 죄인으로 대우하는 모습을 보인다. 단종에 대한 분위기가 변화하는 것은 중종(中宗) 대에 이르러서였으니, 세조가 폐하였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원 논의가 이루어지고 영월에 있던 단종의 묘에 처음으로 우승지(右承旨) 신상(申鏛)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수호군(守護軍)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종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명함으로써 마침내 지위를 완전하게 회복하게 된다.
주천강 쌍섶다리는 바로 영월 장릉의 존재에 기원을 둔다.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숨을 거두고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에 의하여 시신이 수습되면서, 장릉은 유일하게 한양의 도성에서부터 100리 밖에 있는 능이 되었다. 단종이 추복된 후부터 숙종은 새로 부임하는 강원도관찰사로 하여금 반드시 장릉을 참배하게 하였다. 본래 관찰사의 순행을 꺼리던 주민들도 단종의 한을 위로하는 장릉 참배 행렬만큼은 환영하였다고 한다. 강원감영이 있던 원주에서 영월로 오려면 주천강을 건너야 하는데, 관찰사 일행은 가마와 말 등 규모가 커서 일반 다리로는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주민들이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주천리, 서쪽은 신일리가 맡아서 다리 하나씩을 놓았고, 그렇게 완성된 쌍다리를 무관이 말을 타고 점검한 후에야 관찰사 행렬이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관찰사가 장릉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주천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즉 주천강에 쌍섶다리를 놓는 일은 처음 만들어지던 때부터 마을 공동체가 총동원되어 벌이는 일종의 축제와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천강에 섶다리를 놓던 풍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의 연례행사로 전승되어 왔는데, 일제 강점기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5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쌍다리놀이로 재현되어 우수상을 받으며 다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판운리 섶다리마을]
강을 끼고 마을이 형성된 영월에서 마을과 마을을 이어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나룻배와 섶다리였다. 특히 섶다리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도끼와 목재로만 만들지만, 황소를 끌고 지나가도 주저앉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여 주민들의 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역사적인 연원을 지닌 주천강 쌍섶다리와 달리, 판운리 등에서는 일상에서 사용되었던 섶다리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최근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판운리 섶다리마을이다. 섶다리마을은 평창강을 사이에 둔 판운리의 밤뒤마을과 미다리마을을 연결하는 약 70m 길이의 섶다리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섶다리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스라한 정취를 자아낸다는 평을 듣는다. 섶다리에서 상류 쪽으로 200여 m 올라간 지점에 콘크리트로 만든 현대적 교량도 있지만, 섶다리마을에서는 해마다 전통 방식 그대로 섶다리를 재현하고 있다. 미다리마을의 이름도 여름철이면 섶다리가 떠내려가고 없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다리는 30여 년 전만 하여도 화전민 20여 가구가 살던 두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관광객, 사진가 등 도회지 사람들이 섶다리를 보러 오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섶다리마을 일대는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백로, 비오리, 원앙, 수달 등 여러 동물을 볼 수 있으며, 평창강에는 천연기념물인 쉬리·어름치와 민물조개, 다슬기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마을 안쪽으로는 캠핑장과 함께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조성되어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2019년에는 전통 풍속을 계승하고 관광객들에게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판운섶다리문화축제가 개최되었다.
[「쌍다리노래」]
영월에는 「대왕인산요」, 「한양가」, 「쌍다리노래」 등 단종과 관련된 민요가 현재까지도 전하여 오고 있는데, 이 중에서 「쌍다리노래」는 주천강에서 섶다리를 놓을 때 불리며 당시 강원도관찰사가 장릉을 참배할 때 강을 편히 건널 수 있도록 쌍다리를 놓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섶다리의 재료와 섶다리 놓는 과정을 성(性)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선소리꾼이 선소리를 메기면 후창자들이 “에헤라 쌍다리요”로 받는데, 선소리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에헤라 쌍다리요// 다리 노러 어서 오게/ 다리 노러 바삐 오게// 다리 노러 모두 가세/ 다리를 노러 같이 가세// 장릉 알현 귀한 길의/ 강원감사 그 행차가// 편안히 건느도록/ 감사 다리 놓아 주세// 무사하게 건느도록/ 쌍다리 놓아 주게// 나무꾼은 나무 베고/ 장정은 다리 놓고// 아낙네는 음식 날러/ 모두 나와 다리 놓세// 마을 다리는 외다리요/ 감사 다리는 쌍다리는// 다리발도 두 다리요/ 님의 다리 두 다리니/ 에헤는 쌍다리요/ 남의 다리 다 두리요/ 내 다리도 두 다리니// 세상 사람 하나같이/ 다리 위를 좋아하니// 발 안 빼고 건너가니/ 뉘라서 싫어하리// 누운 다리 좋을시고/ 자빠진 다리 싫찮으나// 이 다리는 아니 되지/ 감사 행차 어이할꼬// 다리발을 박아 보세/ 꼿꼿하게 바로 박자// 물쌀에 넘어질라/ 튼튼하게 잠박아라// 쌍다리의 조화이지/ 모두 다 알것마는// 다리발을 헛박아서/ 무자식을 한탄하네// 덕원이를 얹어 주게/ 덕원이를 끼워 주게// 고대광실 양반집의/ 큰 도리를 올리듯이// 조심하여 올려 주게/ 탄탄하게 끼워 주게// 덕원이가 빠지며는/ 이 다리는 쓰러지니// 왕릉 알현 감사 일행/ 건느지 못하리니// 외로웠던 대왕 혼령/ 섭섭하게 여기리라// 다리발과 덕원이에/ 쐐기를 박아 주게// 흔들리지 아니하게/ 뽀듯하게 박아 주게// 박는 것은 무엇이냐/ 뽀듯해야 하느니라// 다리 밟어 얹어 주게/ 다리 밟어 걸어 주게// 산수절경 좋은 터에/ 풍류 정자 지을 적에// 덕원이에 잘 걸어서/ 안 빠지게 잘 걸어라// 다리 밟어 튕겨지면/ 감사 발목 빠지리니// 이 아니 큰일인가/ 공들여 잘 걸어라// 솔갑을 찍어 오게/ 솔갑을 날라 오게// 솔갑을 깔아 주세/ 솔갑을 잘 깔아라// 원앙금침 요 깔듯이/ 반듯하게 고루 깔세// 지붕 위의 이엉 잇듯/ 고루고루 깔아 주게// 흙을 지세 흙을 지세/ 모두 나와 흙을 지세// 너는 두 짐 나도 한 짐/ 모두 함께 흙을 지세// 두껍게 져부어라/ 골고루 펴 주어라// 첫날밤에 이불 펴듯/ 반듯하게 펴 주어라// 바자를 엮어 오게/ 싸리바자 틀어 주게// 너 내 다리 비꼬듯이/ 찰싹 붙여 잘 틀어라// 고대 누각 난간같이/ 새 신방에 병풍 치듯// 바자난간 잘 세워서/ 바람 막고 재난깍세// 다리를 놓았구나/ 쌍다리를 놓였구나// 감사 행차 쌍다리나/ 이불 속에 쌍다리나// 쌍다리는 일반이라/ 뉘라서 싫어하리// 일꾼들은 땀흘리고/ 다리 밑엔 물 흐른다// 에헤라 쌍다리요.”
[관광 콘텐츠로서의 섶다리]
과거 영월 주민들의 일상 속 한 부분이었던 섶다리는 현대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영월을 시작으로 정선, 경상남도 함양군, 경상북도 김천시, 전라북도 무주군, 충청북도 괴산군 등 전국 다양한 지역에서 섶다리를 복원하고 있고, 지역 축제에서 섶다리 놓기 행사를 진행하는 사례도 보인다. 영월군은 2003년 쌍섶다리축제를 시작으로 해마다 섶다리와 관련하여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영월 동강축제, 단종문화제 등 지역의 굵직한 축제 때마다 섶다리 건너기 체험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21년 제45회 단종문화제에서는 동강에 국내에서 가장 긴 250m 섶다리를 놓아 장관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타 지역으로 섶다리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판운리청년회가 전라북도 전주시의 전주천 여울목 섶다리 놓기 사업에 자문 역할을 맡았던 것이 한 사례이다.
이처럼 지역의 문화와 경제를 살리고 지역 공동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방안으로 지역문화콘텐츠를 발굴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시되고 있다. 나무와 섶, 흙만으로 만들어졌지만 황소가 지나가도 주저앉지 않는다는 섶다리는 선조들의 지혜가 녹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게다가 동강을 배경으로 한 섶다리의 고즈넉한 풍경은 도시 문명의 속도와 번잡함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해마다 섶다리를 새로 놓는 일은 지역공동체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적지 않다. 이제는 이처럼 영월 특유의 민속인 섶다리를 기반으로 한 미래지향적 콘텐츠를 발굴, 기획, 생산, 유통할 방법을 통합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