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82
한자 徐三辰
영어공식명칭 Seo Samjin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0년 10월 15일연표보기 - 서삼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서삼진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서삼진 병곡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24년 2월 10일연표보기 - 서삼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서삼진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서삼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 270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서삼진(徐三辰)[1890~1924]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영덕 지역에서는 지품면 낙평리 교회 조사(助事)로 있던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만세시위운동이 계획되었다. 김세영, 권태원 등은 3월 18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내의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의 기독교도와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서삼진정규하(丁奎河)로부터 만세시위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만세시위운동에 적극 찬동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서삼진 등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 결집하였다. 서삼진은 시위군중을 선동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곧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였다. 서삼진이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였다. 그러자 서삼진은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 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공격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서삼진과 200여명의 시위군중은 병곡면 병곡리로 행진하였다. 서삼진를 비롯해 시위군중이 병곡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제지하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에서 응원 출동한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해산 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서삼진은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및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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