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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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顯學妻月城孫氏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미애 |
출생 시기/일시 | 1838년 - 김현학 처 월성 손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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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김현학 처 월성 손씨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고수골 |
성격 | 효열부 |
성별 | 여 |
본관 | 월성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열부.
[가계]
증(贈) 정부인(貞夫人) 월성 손씨(月城孫氏)는 손영덕(孫永德)의 딸이며, 1838년(헌종 4)에 태어났다. 남편은 김찬식(金燦植)의 아들 김현학(金顯學)이며, 어머니는 영양 최씨(永陽崔氏)이다.
후사(後嗣)가 없어 아우 김현인(金顯仁) 아들 증(贈)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김관배(金寬培)로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김현학의 처 월성 손씨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더니 시집가서는 순화한 성품으로 시부모를 모셨다. 시부모가 병환이 들어 돌아가시자 초상을 치름에 효를 다하였다.
남편 김현학이 병에 들자 하늘에 대신 죽기를 빌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자 칼을 들어 목을 찔러 함께 죽으려 하다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빈소가 아직 있고 또 지아비의 시신을 겨우 염을 했을 뿐인데 장차 그 누가 장례를 치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렸다.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빈소에서 곡을 하고 지아비의 신령 앞에서 말하기를, “첩이 박명하여 화가 지아비는 물론 시아버지,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같은 무덤에 묻히는 것이 편안하겠습니까?”하며 함께 죽지 못함을 사죄하고 음독하여 자결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서는 지극한 효를 다하고, 죽어서는 지극한 열을 다하는 사람이 손씨에 더할 자가 있으랴”며 깊이 감동하니, 향중 선비들은 글로써 그 효행을 기리고, 군에서는 표창하였다. 조정에 알리니 강상의 책에 그 기록을 남기고 정려를 명하게 되어 정려각을 지어 월성 손씨의 효열을 널리 기리고 있다.
[묘소]
월성 손씨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고수골 상산(上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고수골에 손후익(孫厚翼)의 찬비명(撰碑銘) ‘증(贈) 정부인(貞夫人) 월성 손씨(月城 孫氏) 정려지문(旌閭之門)’이 남아 있다. 후손 김희태가 교지 등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