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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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御書閣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태훈 |
건립 시기/일시 | 1864년 - 어서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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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21년 - 어서각 중수 |
현 소재지 | 어서각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
성격 | 누정 |
양식 | 장혀수장|홑처마|팔작지붕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전영순 |
관리자 | 용궁 전씨 문중 |
문물|보호단위 등급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수남마을에 있는 전삼달(全三達)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
[개설]
전삼달[1570~1632]의 자는 군형(君炯), 호는 영고정(潁皐亭)으로 용궁 전씨(龍宮全氏) 우천공파(寓川公派)로 영천 입향조인 전영창(全永昌)의 5세손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출전해 공을 세워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보직되고, 원종공신록(原從功臣錄)에 등재되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창원 별장이 되고 후에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전삼달의 묘소가 화산면 화산리에 있었는데 2004년 1월 금호읍 호남리로 이장했다. 이장 당시 그의 무덤에서 전삼달의 미라와 묘지석이 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미라는 송진으로 두껍게 밀봉한 관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위치]
어서각이 있는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수남마을은 용궁 전씨가 세거하고 있는 집성촌으로 해발 124m와 128m 구릉 사이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수남마을 앞은 경부고속도로가 북동-남서 방향으로 놓여있어 꽉 막힌 형세를 취하고 있다. 어서각은 수남마을 최상부의 곡부에 남향으로 있다. 마을 입구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 쪽으로 가면 민가 끝에 어서각이 보인다.
[변천]
어서각은 전삼달이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창원 별장으로 있을 때 그의 성실함을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상과 함께 받은 편지글과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인조가 직접 청나라를 칠 계획을 담은 편지 등 왕에게 받은 편지글을 보관하기 위해 전삼달 사후 1854년 후손[금호읍 거주 전오식의 5대조]이 어서각이라 칭하여 건립했다고 한다.
영천시 녹전동의 오인정 또한 비슷한 시기에 전오식의 5대조가 건립했다고 한다. 1921년 중수를 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지붕에 방수제인 우레탄을 발랐고, 주변의 담장 또한 붉은 벽돌로 치장하는 등 약간의 변형이 되어 있다.
[형태]
어서각은 나지막한 구릉 사이의 곡부에 대지를 평평하게 정지한 다음 문간채와 정자 건물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위는 방형의 벽돌 담장을 두르고 있는데 남동쪽 모서리에 담장이 트여 있어 이곳으로 출입하며, 정자 정면에 위치한 문간채는 현재 폐쇄되어 있다.
정자의 평면형식은 ‘一’자형이고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단출한 장혀 수장의 3량 가 구조이다. 출입은 배면 쪽마루로 올라 우측 방을 돌아서 대청에 이르고 양 방으로 진입하는 다소 불편한 동선을 취하고 있다.
중앙의 두 칸이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고 양협 칸[좌측실 : 근충당(勤忠堂)]에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아궁이는 근충당의 좌측면과 우측방의 배면부에 각각 있다.
좌측 근충당 후면에는 반침을 두었고 나머지는 평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다. 헌함의 평난간은 배면 우협 칸과 양 측면 그리고 전면에 둘러져 있는데 전면의 중앙부가 트여 있다.
청방에는 사분합 들문을 설치하고 대청 후면에는 양 칸 중앙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양협 칸의 방에는 모두 세살창을 두었다.[전면: 쌍여닫이, 측면: 외여닫이 및 쌍여닫이] 내부에는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현판이 전면 중앙부 처마 아래에 걸려 있고 좌측 방 전면에 ‘근충당(勤忠堂)’, 우측 방 전면에 ‘O불재(○茀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구조는 장혀 수장의 단출한 3량 가로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일식 기와를 이엇다. 기단은 붉은 벽돌로 쌓고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했다. 주춧돌은 덤벙 주초[자연석 주초]를 이용했다.
기둥은 전면에만 두리기둥[원형 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방형 기둥]을 이용했다. 특히 전면의 누하 부분은 헌함을 받치기 위한 두리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의 느낌을 주고 있다.
주 상부는 어떤 수장도 하지 않고 장혀와 도리 그리고 대들보로 짜여 있다. 대청 상부의 대들보 위는 제형 판대공을 앉혀 종도리를 받고 있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지붕 형식으로 어칸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아 출입케 했다. 양협 칸은 방을 두었는데 마당 쪽에서 출입하도록 외여닫이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현재 동쪽 방은 전체가 붕괴되어 있다.
[현황]
어서각은 건물의 뼈대는 예전 그대로이지만 지붕과 기단 부분에 변형이 있다. 건물 정면의 문간채는 반파된 채 방치되어 있다. 특히 청방 간 들문은 상부의 인방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있는데 현재 상인방 양단부의 돌쩌귀와 서로 간격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볼 때 예전에는 사분합이 아닌 삼분합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어서각 배면의 둘레에는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고 나머지에는 붉은 벽돌조 담장이 둘러져 있다. 마당에는 향나무와 목백일홍을 조경수로 심었고 건물의 북동쪽 모서리에 변소가 있다. 일곽의 남쪽에는 민가가 여러 채 있는데 대부분 폐가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어서각은 19세기 중반에 건립된 후 일제 강점기에 한 차례 중수된 일반적인 조선 후기 건물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형된 건물로 평가된다. 지붕의 기와가 일식 기와로 교체되고 방수제가 발라진 점, 시멘트와 벽돌로 마감된 기단 등은 건물의 이미지를 반감시키고 있다.
하지만 가식 없는 평난간의 구성과 누하 부분의 기둥 표현은 단출한 건물의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전면의 평난간이 중앙부에서 트인 점은 예전의 진입 구조가 현재의 배면 진입이 아닌 정면 진입 구조일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꾸준한 관리가 요구되며 관리 주체의 변화를 통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