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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의 원형을 찾아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101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북부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기혁

양산에는 읍성을 비롯하여 신기산성(성황), 북부동산성(동산성), 우불산성, 마고산성(고장성), 단조산성 등 성곽이 적지 않게 축조되었다. 이곳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양산 물금까지 힘차게 흘러 들어와 한 번 숨은 쉬는 장소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밀양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낙동강이 합천 황강에서 흘러오는 또 다른 줄기와 어우러지는 삼랑진부터 자못 위용을 갖추니 여기서부터 물금까지 도도히 흘러내리는 모습은 장중한 교향악같다고나 할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언급한 것처럼 물금은 낙동강의 수량이 한곳에 합쳐져서 그 흘러내리는 모습이 장대하다. 그러한 양산의 입지를 잘 활용하면 천혜의 요새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산은 많은 성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양산읍성은 양산의 여러 산성을 관할하던 중심지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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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

양산읍성은 성벽 축조기법은 길고 큰 돌을 가로로 쌓아 기단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약 20㎝ 뒤로 물려서 큰 바위를 반듯한 면이 밖으로 나오게 쌓았다. 성의 벽면은 벽돌 쌓기 식으로 어긋나게 쌓고, 그 벌어진 틈새는 돌로 메웠다. 전체 성벽은 너비 약 2m 정도로 추측한다. 읍성의 성벽은 주민들의 일정한 공동생활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 건축물이다.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의지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려는 통치자의 치국이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곳에 백성이 운집하여 소도시화되어 농산물의 집산지가 되고 지방문화의 중심지로 오늘날 지방도시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대부분이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부정형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모습은 성곽이 위치한 자연지형에 맞게 성곽을 축조하게 됨에 따라 지형 곡선을 따라 형성된다. 양산읍성의 경우 배후에 산을 두고 앞이나 측면에 하천을 두는 입지를 택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부정형의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읍성이 자리하는 곳은 북쪽에 진산이 있어 평지와 산을 포함하는 평산성의 형태로 조성되어진다.

거의가 동서남북 4개의 문을 축조하고 이들 문을 연결하는 십자형의 가로망을 간선으로 하고 이 가로들에 평행 또는 직교하여 일정 간격을 두고 소로들이 그어져 있다. 양산의 읍성에도 전형적으로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 있다. 양산읍성 내의 길은 크게 동서로와 남북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동서로는 이전에 몇 개의 길이 있었다. 그 중에서 동헌의 앞쪽으로 난 길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옛길들이 신작로로 변화여 이것이 읍성 내의 길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백성들은 길을 지나면서 동헌의 위세에 혹시 죄도 없으면서 육방의 관속들에 체포되지 않을 노심초사하고 지나 다녔을 것이다. 읍성의 서문과 동문으로 연결하는 쪽에 동서로가 있었다. 이 길은 조선시대 양산의 읍내민 혹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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