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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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仁涵 |
이칭/별칭 | 양숙(養叔),죽재(竹齋),죽당(竹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정덕 |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양숙(養叔), 호는 죽재(竹齋)·죽당(竹堂). 증조할아버지는 윤사하(尹師夏)이고, 할아버지는 윤탕(尹宕)이며, 아버지는 첨정 윤응규(尹應奎)이다. 어머니는 이수동(李壽童)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윤인함(尹仁涵)[1531~1597]은 1552년(명종 7)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58년(명종 13) 예문관 검열과 대교, 1559년(명종 14) 홍문관 정자, 1560년(명종 15) 홍문관 저작·홍문관 박사·홍문관 부수찬 겸 지제교, 1561년(명종 16) 병조좌랑과 이조좌랑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영리하고 말을 잘하였으나 가벼운 면이 있어 이조 정랑에 있을 때인 1563년(명종 18) 함부로 권력을 휘두른 이량(李樑)과 친하게 지낸다는 모함을 당하고, 전선(銓選)[이조와 병조에서 행한 문관, 서리, 무관에 대한 인사 행정]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얼마 후 복직되어 성균관 전적,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을 맡았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청하여 풍덕 군수로 나갔다가 양주 목사로 옮겼다. 1578년(선조 11) 사복시 정, 1581년(선조 14) 황주 목사가 되었으나 1583년(선조 16) 관아 창고의 곡식을 축낸 죄로 파면되었다. 1584년(선조 17)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윤인함은 경주부 윤이었다. 하지만 나약하고 겁이 많다는 이유로 판관 박의장(朴毅長)에게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났다. 언양에서 곧장 지름길로 치고 올라온 왜군이 들이닥치자 혼자 경주성을 지키던 박의장이 도망쳐 버리고, 경주성은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윤인함은 의병을 모아 수백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1593년(선조 26)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곧 파직되었다. 뒤 이어 호조참의, 1596년(선조 29)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명나라 원군이 왔을 때 윤인함은 영위사(迎慰使)를 겸하여 명나라 장수를 접견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죽재집(竹齋集)』이 있다. 윤인함은 문장과 그림에 능하고,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려 호를 죽재라 하였다고 한다.
[묘소]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26-1번지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