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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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毅立 |
이칭/별칭 | 윤의립(尹義立),지중(止中),월담(月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정덕 |
출생 시기/일시 | 1568년 8월 - 윤의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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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별시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우부승지 호조 참의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626년 - 경주 부윤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좌참찬 |
몰년 시기/일시 | 1643년 9월 29일 - 윤의립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91년 - 신도비 건립 |
묘소|단소 | 윤의립 묘 -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산26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산26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파평 |
대표 관직 | 의정부 좌참찬 |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지중(止中), 호는 월담(月潭). 초명은 윤의립(尹義立). 인조반정 이후 윤의립(尹毅立)으로 이름을 바꾼 듯하다. 증조할아버지는 별제 윤정림(尹廷霖)이고, 할아버지는 윤희렴(尹希廉)이며, 아버지는 공조 판서 윤국형(尹國馨)이다. 어머니는 조수(趙琇)의 딸이다. 동생 윤정립(尹貞立)[1571~1627]은 선비 화가로, 그림을 잘 그렸다.
[활동 사항]
윤의립[1568~1643]은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괴원(槐院)[승문원의 별칭]에 들어갔다가 한원(翰苑)[한림원 혹은 예문관의 별칭]으로 옮겨 벼슬이 대교에 이르렀다. 홍문관 정자를 거쳐 응교를 지냈고, 춘방(春坊)[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었다. 인조 즉위 초반에 벼슬살이에 굴곡을 겪었다. 1623년(인조 1) 형조참판, 예조 참판 비국 유사당상에 올랐으나 1624년(인조 2) 조카가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벼슬을 내놓았다. 2년 후인 1626년(인조 4) 복귀하여 경주부윤이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파란하였고, 좌참찬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양주(楊州)·강화(江華)·광주(廣州)·장단(長端)의 부사를 거쳐, 경상 감사와 전라 감사를 지냈다. 그 뒤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공청도·경기도·함경도에서는 임기를 모두 마쳤다.
1643년(인조 21)의 기록인 『인조실록(仁祖實錄)』 44권에는 윤의립에 대해 “외관이 단아하고 성품은 관대하며 겸손하고 신중하였다. 중요한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고, 여러 지방의 장관으로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들었다. 재상에 오른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한결같이 청빈하여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학문과 저술]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畵家篇)에 소개될 만큼 산수화 실력이 뛰어났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화첩(山水畵帖)』과 윤의립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산수화(山水畵)」 두 폭이다. 『산수화첩』을 통해 윤의립의 그림들은 중국 남송(南宋)의 마하파(馬夏派)[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화풍] 및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산을 울퉁불퉁하게 표현한 것이나 표면 처리, 새로운 편파 구도 등에서 윤의립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저서로는 『야언통재(野言通載)』와 만물의 표상에 대해서 묻는 『산가청사(山家淸事)』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산26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1년(정조 15) 방계 5세손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윤필병(尹弼秉)이 글을 짓고, 5세손 윤필한(尹弼漢)이 비석을 세우고 묘표를 해 신도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