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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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王+奕] |
이칭/별칭 | 대이(大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709년 - 오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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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34년 -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35년 - 선전관 |
활동 시기/일시 | 1737년 - 훈련원 주부 |
활동 시기/일시 | 1738년 - 선전관 |
활동 시기/일시 | 1739년 - 첨정, 풍천 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740년 - 여주 목사 |
활동 시기/일시 | 1750년 - 참핵사, 사복시 내승 |
활동 시기/일시 | 1752년 - 충청도 수군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753년 - 경상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754년 - 전라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755년 - 금군 별장, 도총부 부총관 |
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759년 - 포도대장 |
활동 시기/일시 | 1760년 - 포도대장, 금군 별장 |
활동 시기/일시 | 1762년 - 제영 중군, 훈련대장, 어영대장, 총융사 |
몰년 시기/일시 | 1769년 8월 6일 - 오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4년 - 신도비 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417번길[석현리 342-6]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417번길[석현리 342-6]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해주 |
대표 관직 | 어영대장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해주. 자는 대이(大而). 5대조는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오정방(吳定邦)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낸 오핵(吳翮), 할아버지는 병조좌랑을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된 오두룡(吳斗龍)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된 오창주(吳昌周)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함양 여씨(咸陽呂氏)로 동지돈녕부사 여필시(呂必時)의 딸이다. 부인 함안 윤씨(咸安尹氏)는 통덕랑 윤상정(尹象鼎)의 딸이다.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참봉 오재능(吳載能), 둘째 아들 통정 부사 오재광(吳載光), 셋째 아들은 무신으로 수사를 지낸 오재중(吳載重)이다. 딸들은 부사 이동식(李東植), 현감 이영운(李榮運)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낳은 세 아들은 무신 오재성(吳載誠), 사과(司果) 오재공(吳載恭), 교관 오재충(吳載忠)이다.
[활동 사항]
오혁(吳 王+奕)[1709~1769]은 1734년(영조 10)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고 1737년(영조 13) 훈련원 주부, 다음해 다시 선전관을 지냈다. 1739년(영조 15) 첨정으로 승진하였으며, 풍천 부사로 나갔다. 이듬해 여주 목사가 되었으며 1747년(영조 23)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1750년(영조 26) 조정에서 변방이 허술한 것을 염려하여 오혁을 참핵사로 파견하였고, 사복시 내승에 임명하였다.
1752년(영조 28) 충청도 수군절도사, 1753년(영조 29) 경상도 병마절도사, 1754년(영조 30)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755년(영조 31)에는 금군 별장과 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다. 1756년(영조 32)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759년(영조 35) 포도대장, 1760년(영조 40) 포도대장, 금군 별장을 지냈다. 1762년(영조 38) 영흥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제영 중군(諸營中軍), 훈련대장과 어영대장, 총융사 등을 지냈고 1769년(영조 45) 8월 6일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무덤이 있다. 처음에는 양성(陽聖) 천덕산(天德山) 선영의 남쪽 언덕 서쪽에 장사 지냈으나 1788년(정조 12) 9월 6일에 석현리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814년(순조 14)에 세워진 신도비가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342-6번지에 있다. 지방도 349호선이 인접해 있는 곳이다. 신도비는 비좌와 비신,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문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오재순(吳載純)이 짓고, 사간원 정언 이익회(李翊會)가 썼으며,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이채(李采)가 전액(篆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