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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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洬 |
이칭/별칭 | 호중(浩仲),이지(二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600년 - 신속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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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별제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영천 군수, 정시문과 을과 급제, 춘추관 편수관 겸임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 - 산릉감 역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 양주목사 |
활동 시기/일시 | 1655년 - 공주 목사, 『농가집성』 편찬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구황보유방』, 『구황촬요』 편찬 |
몰년 시기/일시 | 1661년 - 신속 사망 |
부임|활동지 | 양주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고령 |
대표 관직 | 양주목사 |
[정의]
양주목사를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호중(浩仲), 호는 이지(二知). 증조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신석정(申碩丁), 할아버지는 서윤(庶尹) 신단(申湍), 아버지는 승지 신경락(申景洛)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로 윤기묘(尹起畝)의 딸이다. 영원군(靈原君) 신경식(申景植)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유대일(兪大逸)의 딸이다. 형은 신육(申淯)이다.
[활동 사항]
신속(申洬)[1600~1661]은 1624년(인조 2) 진사로 명경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시험관의 천거로 별제에 제수되었고, 이후 충훈부 도사, 호조 낭관, 옥천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영천 군수(榮川郡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그 뒤 지평, 필선이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을 보좌하였다. 여러 차례 문무 시험을 관장하였고, 장령을 거쳐 1649년 인조가 죽은 직후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산릉감역(山陵監役)에 임명되었다.
승지와 참의에 천거되었으나 1651년(효종 2) 인척인 김자점(金自點)이 처형되자 연안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같은 해 양주목사로 나가 있을 때 역적의 친척을 관직에 둘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대사헌 홍무적(洪茂積)의 변론으로 무마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승진을 하지 못하였다. 공주 목사와 청주 목사로 재임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감사 및 병사가 조정에 표창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7대조 신숙주(申叔舟)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을 1644년에 다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1655년(효종 6) 공주 목사로 있을 때 『농사직설(農事直設)』을 구하기 어려운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다양한 농사법을 더하고, 중국 남송의 사상가 주희(朱熹)의 『권농문(勸農文)』·『금양잡록(衿陽雜錄)』·『사시찬요(四時纂要)』 등을 묶어 『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며, 17세기 농업 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1660년(현종 1) 기아 방지와 질병 치료를 위해 『구황보유방(救荒補遺方)』을, 고구마 등 구황 작물을 다룬 『구황촬요(救荒撮要)』를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