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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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軼 |
이칭/별칭 | 가중(可仲),숙정(肅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454년 - 송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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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77년 - 생원시,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482년 - 친시문과 을과 급제, 진현시 |
활동 시기/일시 | 1485년 -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496년 - 우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01년 - 임지성 변란 음모 진압, 형조참판,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정헌대부, 예조판서, 형조판서, 경기도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06년 - 예조판서, 여원군에 봉해짐 |
활동 시기/일시 | 1509년 - 함경도체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12년 - 이조판서, 우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513년 - 좌의정, 영의정, 사임 |
몰년 시기/일시 | 1520년 - 송질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20년 - 묘갈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545년 - 신도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8년 - 사당 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56번길[선암리 산15-1]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56번길[선암리 산15-1] |
사당|배향지 | 와룡재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56번길[선암리 산15-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여산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가중(可仲). 증조할아버지는 내자소윤(內資少尹)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송진생(宋辰生), 할아버지는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지냈고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된 송만달(宋萬達), 아버지는 훈련 도정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된 송공손(宋恭孫)이다. 어머니는 박겸형(朴謙亨)의 딸이다. 부인은 남원 양씨(南原梁氏)로 이조판서 양성지(梁誠之)의 손녀이고 종친부 전첨 양원(梁瑗)의 딸이다.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부사 송지한(宋之翰), 호군 송지간(宋之幹), 사옹원 참봉 송지정(宋之禎)이다. 딸은 덕산 현감 이형간(李亨幹), 내자시정 신거이(愼居易),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송질(宋軼)[1454~1520]은 1477년(성종 8)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1482년(성종 13) 진현시(進賢試)에 발탁되었고, 홍문관 정자를 거쳐 1485년(성종 16) 지평에 올랐다. 당시 조정에서는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관찰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사저곡(私儲穀)[사사로이 개인이 쌓아 놓은 곡식]과 제사사(諸寺社)의 장리곡(長俚穀)[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 주는 곡식]을 철저히 조사하여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거두어 들이게 하였다. 송질이 이 일을 맡아서 진두지휘하였다.
충청도 진천 지방을 조사한 결과 재상 신균(辛均)과 상장군 오유종(吳有終)의 집 창고에 수만 석의 곡식이 쌓여 있는데 반해 관아 창고에는 겨우 100석뿐이므로 진천 고을의 관리들을 징계하였다. 또한 지방에 농장을 갖고 있는 재상들이 스스로 세금을 내게 하는 방안도 마련, 실시하게 하였다.
병조정랑, 승정원의 동부승지 및 부승지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우승지가 되었다. 이때 왜인들이 불법으로 약재 무역을 하자 임금에게 청하여 직접 나가 단속을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는 전염병 치유에 힘써 백성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 후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오랫동안 북쪽의 국방에 힘썼고, 1501년(연산군 7)에는 황해도 주민 임지성(林之盛)의 변란 음모를 미리 알아내 진압하여 그 공로로 형조 참판에 올랐다. 같은 해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호조·이조의 참판을 지냈다. 동지춘추관사와 지의금부사로 있을 때는 경재소(京在所)의 당상관 별감을 토성조관(土姓朝官)에 임명되어 풍속을 바로잡고, 왕자와 사대부들이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504년에 정헌대부, 예조판서에 올랐고, 형조판서,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 예조판서로서 정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여원군(礪原君)에 봉해졌다. 1509년(중종 4) 함경도 체찰사로 있을 때는 함경도 국경 지대인 육진 지역에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고, 북쪽의 여러 지방을 돌아보고 나서 무산과 풍산 지방의 「이배도(移排圖)」를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1512년(중종 7) 이조판서와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들로부터 탐오(貪汚)하다는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15-1번지에 묘소가 있다. 묘는 묘역 정화 사업으로 조성된 석축 곡장(曲墻) 안에 있으며, 봉분에는 사다리형으로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중앙에 투구형에 연을 조각한 묘비를 세우고 상석, 향로석, 문인석, 무인석 등을 배치하였다. 묘갈은 1520년(중종 15)에 건립되었다. 송질 묘 및 신도비는 양주시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545년(인종 1) 신도비가 세워졌다. 묘역 입구 오른편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장방형 비좌에 백대리석 비신, 팔작지붕형의 옥개를 갖추었다. 비문은 성세창(成世昌)이 짓고, 김노(金魯)[1498~1548]가 썼으며, 박영(朴英)이 글을 전자하였다. 묘소 부근에는 ‘와룡재(臥龍齋)’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1988년에 송질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의 기와집에 위패 봉안소 및 재실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