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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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乙珍 |
이칭/별칭 | 병재(丙齋),사천(沙川),고려사처사(高麗四處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권만용 |
활동 시기/일시 | 1368년 - 현량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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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393년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12년 - 정절사[임간서원]에 배향됨 |
추모 시기/일시 | 1841년 - 신도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신도비 추가 건립 |
출생지 | 개경 좌경동 - 경기도 개성시 |
거주|이주지 | 양주 사천현 봉황산 - 경기도 양주시 |
거주|이주지 | 감악산 남선굴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382번길[봉암리 24]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382번길[봉암리 24]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382번길[봉암리 24] |
사당|배향지 | 정절사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은현로 382번길[봉암리 산50-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의령 |
대표 관직 | 참지문하부사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증조할아버지는 밀직부사 남군보(南君甫), 할아버지는 풍저창 부사 남익저(南益㫝)이다. 아버지는 지영광군사를 지낸 남천로(南天路)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중랑장 박종(朴琮)의 딸이다. 부인은 순창군부인(順昌郡夫人) 임씨(任氏)이다. 형은 시중(侍中)을 지낸 남을번(南乙蕃)이다. 아들은 남근(南瑾)·남이(南珥)·남규(南珪)로,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다. 조카[남을번의 아들]는 조선의 개국 공신인 남재(南在)·남은(南誾)이다. 생육신 남효온(南孝溫)[1454~1492],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고 영의정에 오른 남곤(南袞)[1471~1527],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1629~1711]도 남을번의 후손들이다.
[활동 사항]
남을진(南乙珍)[?~1393]은 1368년(공민왕 17) 현량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공양왕 때 벼슬이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을 공부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과 교유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양주 사천현 봉황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의 벼슬을 주면서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경기도 적성(積城)의 감악산 석굴에 들어가 일절 나오지 않고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남을진이 죽고 사흘 동안 흰 구름이 동굴 위를 맴돌았는데, 시신을 거두어 밖으로 나오니 큰 바람이 일어 굴속에 있던 책들을 산산이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남선굴(南仙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천석(元天錫)이 고려의 종사(宗社)를 잇고자 치악산 정상에 제단을 쌓고 변혁사(變革祀)를 지낼 때 남을진도 동지들과 종참(從參)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남을진, 원천석, 서견(徐甄), 이양소(李陽昭)를 고려사처사(高麗四處士)라고 불렀다. 남을진은 고려 멸망 후 개경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둔한 72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산50-2번지[은현로 382번길]에 있다. 묘 앞에는 묘비 2기,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2기, 근래에 마련한 사자석 2기 등이 있다. 묘역에는 신도비 2기, 재실 등이 있다. 남을진의 묘역은 양주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712년(숙종 38) 임간서원에 조견(趙狷)과 함께 배향되었다. 1724년(경종 4) 정절사(旌節祠)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영조 때 사천서원(沙川書院)에 배향되었다. 1841년(헌종 7) 신도비도 세워졌다. 백색 화강암 비좌에 유백색 대리석 비신, 화강암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신에 적힌 글은 우의정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짓고 승정원좌부승지 송상래(宋祥來)가 썼다. 화강암 옥개석은 앞쪽이 군데군데 산화되고 이끼가 끼어 있다. 1986년 3월 남을진의 20세손인 남상룡(南相龍)·남상명(南相明)·남상길(南相吉) 삼형제가 묘역 입구 오른쪽에 새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귀부를 갖추었으며, 비석에는 국한문 혼용으로 남을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봄가을로 기제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