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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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克寬 |
이칭/별칭 | 제중(制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546년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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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남양 비파항으로 이사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도성 남쪽으로 이사 |
몰년 시기/일시 | 1613년 2월 19일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5년 3월 - 묘갈 건립 |
거주|이주지 | 경기도 양주시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평화로[산북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사산감역관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지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중(制仲).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참의를 지낸 권령(權齡), 할아버지는 상주 목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권박(權博)이다. 아버지는 종묘서 영을 지냈고 좌참찬에 추증된 권덕유(權德裕)이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로 우찬성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1466~1543]의 딸이다. 형은 이조판서를 지낸 권극례(權克禮), 예조판서를 지낸 권극지(權克智)이다. 부인은 함안 윤씨(咸安尹氏)로 경양군(景陽君) 윤수환(尹壽環)의 외손녀이자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딸은 윤숭(尹嵩)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손을 남기지 못하였다. 아들 권창국(權昌國)도 일찍 죽어 권극례의 셋째 아들 좌랑 권득기(權得己)를 후사로 삼았다.
[활동 사항]
권극관(權克寬)[1546~1613]은 천성이 쾌활하고 온화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반듯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처음 읽는 글도 대략의 뜻을 알 정도로 총명하였다. 과거 공부를 하던 중 학문의 참뜻을 저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실망하여 출세를 포기하였다. 그 후 한강 변에 집을 지어 밭 갈고 낚시를 하면서 20년을 보냈다.
양식이 자주 떨어질 정도로 가난한 살림을 보고 상서 양공(尙書兩公)이 벼슬을 권하여 사산재식감역관(四山栽植監役官)[한양의 백악산, 목멱산, 인왕산, 타락산에 소나무를 심고, 나무를 베지 못하게 감시하던 벼슬]이 되었다. 뒤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토목 일을 맡아 하는 관청의 벼슬]을 맡았다. 권극관은 일 처리를 공평하게 하였고, 자신이 부리는 아전들에게 이르기를 “아전이 잘못하면 관헌이 파면시켜야 한다. 그러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남들과 좋지 않은 일로 엮이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니 모두가 수긍하여 양심껏 일하였다.
권극관은 성품이 소박하고 예의가 발랐다. 중국 사람이 그의 예절에 반해 청포(靑布)로 만든 복건과 베로 만든 학창의(鶴氅衣)[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져 있으며 가장자리에 검은 천을 댄 윗옷]를 선물하니 평소에 즐겨 입었다. 남양에 이사하였을 때 향촌의 유림들이 권극관의 소탈함과 자잘한 일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경시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욕심이 없고, 초연한 사람인 것을 알고 나서는 모두가 존경하였다.
1590년(선조 23) 가을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고, 3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다. 1595년(선조 28) 가을 남양 비파항으로 옮겼고, 1611년(광해군 3) 의약품을 구하기 쉽도록 도성 남쪽으로 이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2월 19일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권극관의 묘소는 양주시 산북동[평화로]에 있으며 부인과의 합장묘다.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지은 묘갈(墓碣)이 1685년(숙종 11) 3월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