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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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서동일 |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같은 성씨가 오랜 기간 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지역.
[개설]
집성촌이란 하나의 지배적인 동성 동족(同姓同族) 집단이 특정 마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이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선, 어떤 성씨는 고려 시대 혹은 고대까지 올려 잡기도 하고, 실제로 어떤 거주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성촌이 300~400년 혹은 500~6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에 집성촌이 양산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집성촌 양산을 17세기 이후로 잡는 이유는 16세기 이전까지는 자녀 균분 상속(子女均分相續)이 철저하게 지켜졌고, 그런 이유로 집성촌의 형성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부모들이 아들과 딸, 친손자와 외손자를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위[딸]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고 부모의 제사도 자녀들이 아들딸 구별 없이 돌아가며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따라서 동족 부락인 집성촌은 사회 전반에 성리학(性理學) 이념이 뿌리를 내려 부계(父系)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정착되는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형성]
양주 등 경기 북부 지역은 조선 시대에 수도 한양과 거리가 가까워 고려 후기부터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거주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집성촌의 형성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적의 침입이나 국내의 정치적 변화를 피하기 위해 이주한 경우이다. 둘째, 국왕이 하사한 토지인 사패지(賜牌地)[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땅] 주변에 정착한 경우이다. 셋째, 왕실 묘역 주변에 정착한 경우이다. 넷째, 중앙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낙향하여 정착한 경우이다.
1. 사패지 주변에 집성촌이 형성된 사례
우선, 사패지 부근에 집성촌이 형성된 사례이다. 중앙 관리의 경우 국가에 큰 공로를 세우면 수도에서 가까운 경기도 일대에 사패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양주 최씨(楊州崔氏) 및 부여 서씨(扶餘徐氏) 집성촌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양주 최씨 집성촌의 기원은 고려 시대로 올라가는데, 시조는 최억(崔億)이다. 최억은 고려 말기에 호부상서 등을 지낸 뒤 1353년(공민왕 2) 양주군(楊州君)에 봉해졌으며, 양주에 사패지를 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양주에 정착해 본관으로 삼으면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의 부여 서씨 집성촌의 입향조는 조선 중기 한당계(漢黨系)의 실무 관료로 이름이 높았던 육곡(六谷) 서필원(徐必遠)[1614~1671]이다. 서필원의 후손들이 충청도 논산에 거주하다가 양주에 들어오게 된 것은 서필원을 총애하던 현종이 그의 사후 양주에 토지를 하사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필원의 묘는 현재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광릉촌(光陵村)에 있는데, 이곳은 원래 효종의 사위인 인평위(寅平尉) 집안에 내려진 땅인데, 서필원을 아꼈던 현종이 묘지 장소로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이로부터 서필원의 묘소 부근에 후손들의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현재도 서필원의 종손(宗孫)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2. 왕실 묘소 주변에 집성촌이 형성된 사례
다음은 왕실 묘소 주변에 집성촌이 형성된 사례이다. 경기 북부 지역에는 왕실의 묘소가 집중되어 있고, 특히 양주와 고양에는 이 현상이 두드러졌다. 따라서 왕실의 묘소를 중심으로 왕실인 전주 이씨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한 경우가 많았다.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경기도에는 144개의 전주 이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였다. 현재도 양주시에는 12개의 전주 이씨 집성촌이 발견된다. 전주 이씨 집성촌은 대개 입향조의 사망 혹은 이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양주시 덕계동 집성촌은 경녕군파의 이형욱(李馨郁)이 사망하여 안장된 이후, 남면 신산리는 덕천군파 이유정(李惟貞), 백석읍은 덕천군파 이철(李轍) 이하의 후손, 은현면 선암리는 이태동(李泰東), 광적면 우고리는 무림군파 후손들이 안장된 이후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광사동은 선성군파 이진기(李震起), 광적면 가납리는 효령대군파 이양(李讓), 광적면 우고리 삼현동은 효령대군파 이동수(李東秀), 광적면 광석리는 영산군파 이시창(李時昌), 광적면 비암리는 임언군파 이후열(李厚悅), 광적면 덕도리는 주부공파 이영식(李永式), 만송동은 효령대군파 이지제(李之悌)가 각각 양주에 이주한 뒤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변천]
이렇게 형성된 집성촌은 후대로 갈수록 양반들의 집성촌인 반촌(班村)인지 일반 평민의 집성촌인 민촌(民村)인지를 판별하기 어렵다. 시기적으로 현달한 사족(士族)은 있었으나 오랫동안 번성한 반촌(班村)은 적다. 이는 양주의 사족들이 중앙 정계를 무대로 활동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지만, 문중 의식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즉 사족의 지위가 가문 의식과 학문에 의해 증진되지 못하고 관직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 후대에 중앙 정계에서 탈락하거나 지속적으로 관리를 배출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집성촌의 성격도 반촌에서 점차 민촌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정치적인 격변으로 인해 집성촌이 분산·해체되는 사례도 발견된다. 양주시 남면 두곡리의 수원 백씨 집성촌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두곡리의 수원 백씨 집성촌은 입향조가 백익견(白益堅)인데, 두 아들인 백인호(白人豪)와 백인걸(白人傑) 가운데 장자인 백인호 계열만이 남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백인걸의 후손들은 정쟁의 소용돌이에 말려 전라도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집안의 집성촌이 분산된 것은 조선 중기의 정쟁과 관련이 있다. 사촌 간이었던 백유양(白惟讓)[백인호의 아들]과 백유함(白惟咸)[백인걸의 아들]은 1589년(선조 22)의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서 각각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때 동인(東人)으로 명망이 높던 백유양이 장살(杖殺)되자 백유함의 가족과 후손들은 더 이상 양주에 머물지 못하고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현황]
조선 시대에는 대구 서씨·남양 홍씨 등 22개의 유력한 집성촌을 포함해 다수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은현면 비동 전주 이씨 등 11개 집성촌이, 1950년대에는 마전동 광산 김씨 집성촌 등 47개 집성촌[『경기도지』 하, 1957]이, 1990년대에는 남면 신암리 진주 강씨 등 총 62개의 집성촌[『양주군지』 하, 1992]이 확인된다.
현재 남아 있는 집성촌은 토착 성씨는 드물고, 대개 외부에서 들어온 이성(異姓)이 많다. 6·25 전쟁 기간에는 의외로 집성촌의 수와 규모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경기 북부지역 집성촌과 사족』[정만조 외, 2004]을 펴낸 국민대학교 조사팀이 1997~1999년 경기 북부 지역의 집성촌을 조사한 결과, 이 지역은 38선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기간에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와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전쟁으로 인해 집성촌의 구성원들이 다수 사망하거나 대대로 소장해 온 자료들을 잃은 경우는 있었어도 전쟁이 수백 년간 지속된 집성촌을 해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7월 양주 일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집성촌의 축소, 해체된 근본 요인은 전쟁보다도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진 급격한 도시화와 1980년대 이후의 재건축 붐으로 인해 인구가 도시로 유출된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