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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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靜窩鄭公民始之藏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산88묘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도남 |
건립 시기/일시 | 1807년 -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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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745년 - 정민시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00년 - 정민시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00년 - 정조가 정민시를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충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림 |
현 소재지 | 정와정공민시지장비 -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산88묘 N37° 48′ 38.8595″, E127° 02′ 16.6118″ |
성격 | 사적비 |
관련 인물 | 정민시(鄭民始)|정조(正祖)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71㎝[높이]|61㎝[너비]|36㎝[두께] |
[정의]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정민시(鄭民始)의 묘 아래 있는 조선 후기 정조의 친필 사적비.
[개설]
정민시[1745~1800]는 본관이 온양이고 자는 중초(仲初), 호는 정와(靜窩)이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세손시강원필선으로 정조를 보필하였으며,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발탁되어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나 홍국영과는 반대로 끝까지 분수를 지켜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건립 경위]
1800년(정조 24) 정민시가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시장(諡狀)[시호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건의할 때, 그 인물의 행적을 적어 올리던 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시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국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전교를 내렸다. 정와정공민시지장비(靜窩鄭公民始之藏碑)는 이러한 배경에서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것으로, 정조가 친히 하사한 글을 새긴 비석으로 유명하다.
[위치]
양주시 산북동의 사장골, 온양 정씨(溫陽鄭氏) 묘역의 왼편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정민시의 묘소 아래쪽에 위치한다.
[형태]
옥개형의 3면 비로, 비석의 규모는 옥개석이 너비 100㎝, 두께 54㎝, 높이 75㎝이고, 비석이 너비 61㎝, 두께 36㎝, 높이 171㎝이며, 비좌가 너비 105㎝, 두께 72㎝, 높이 39㎝이다.
[금석문]
비석 앞면에 가로로 ‘정묘어필(正廟御筆)’이라 전서를 새기고, 세로로 ‘정와정공민시지장(靜窩鄭公民始之藏)’이라 새겼다. 비문은 정조가 1800년 6월에 승하함에 따라 정조의 전교에서 집자(集子)한 것이다.
[현황]
비석을 세울 때 비각도 함께 건립하였는데, 당시 만들어진 비각이 몇 해 전에 허물어져 최근에 다시 건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정와정공민시지장비는 정조의 친필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비문의 내용 중, 정조가 전교를 내려 어필을 묘갈(墓碣)로 쓰라고 하였는데 정조가 승하하여 그 뇌문(誄文)[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의 일종]과 전교만을 싣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정와정공민시지장비는 신도비나 묘갈의 성격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