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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면 3·1 만세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81
한자 長興面 三一 萬歲 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창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연표보기 - 이회명의 주도로 만세 시위 개시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일제, 무력으로 시위 진압
발생|시작 장소 장흥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지도보기
종결 장소 장흥면 3·1 만세 운동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지도보기
성격 만세시위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회명|정윤삼|김순갑|김완순

[정의]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경기도 양주 지역은 의병 운동의 전통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국권 회복을 위한 주민들의 역사적 인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점차 격렬하게 확산되고 있던 서울의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1919년 3·1 운동 초기부터 만세 운동에 대한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독립 만세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경과]

1919년 3월 28일 밤 8시경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의 면소재지인 교현리에서 이 지역 출신 양반이었던 이회명 등이 중심이 되어 동리 주점 앞에 수십 명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주민들은 다음 날도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하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3월 29일 이른 아침 다시 동민들이 집결하자 이회명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 행렬을 인도하고 장흥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당시에는 현재의 송추초등학교 자리에 헌병 분견대가 있었고, 장흥면사무소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헌병 분견소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위 대원들이 면사무소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시위 군중이 300여 명으로 늘었는데, 정윤삼·김순갑(金順甲)·김완순(金完順) 등이 적극적으로 시위 행렬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이 급거 출동하였고, 처음에는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일본 헌병들도 만세를 같이 불렀다고 한다. 시위대는 헌병 보조원이 총기로 위협하자 이들의 총기 탈취를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결과]

시위는 다수의 군중과 일본 헌병과의 충돌로 격렬한 양상을 띠었고, 일제는 무기를 사용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시위대 1명이 현장에서 숨졌으며, 군중 3명이 부상을 당했고, 일본 헌병 측도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장흥면 3·1 만세 운동에서 주목할 점은 다른 곳과 달리 양반 계층의 인사가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교현리 출신의 이회명은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교현리에서 세거해 온 양반 계층의 인사였다. 장흥면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서산(西山)이라고 표현된 이곳은 왕들이 사냥을 자주 하던 곳이자 환관이 많이 살던 곳이다. 따라서 신분적 질서가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곳이다. 장흥면에서는 백석면과 같이 이틀에 걸쳐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시위대가 시위를 탄압하는 일본 헌병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순국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격렬하게 치러진 만세 시위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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