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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029
한자 儒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집필자 서동일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서 공자(孔子)의 정치 이념, 학문, 의례에 관한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했던 사상.

[개설]

유교(儒敎)는 공자가 제창한 정치 이념, 도덕 수양의 방법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사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양주군읍지(楊州郡邑誌)』·『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 조선 시대~일제 강점기의 기록에서는 현재의 양주 지역에서 성장한 저명한 유학자를 발견하기 어렵다. 양주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타 지역에 비해 학술적인 의미의 유교보다 윤리적, 실천적인 의미의 유교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교와 직접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인물, 교육 기관, 관련 시설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인물]

1. 남을진

고려 말기의 충신인 사천(沙川) 남을진(南乙珍)[1331~1393]은 조선의 개국에 반대해 후대에 남선굴(南仙屈)이라 불린 동굴 속에 들어가 머리를 풀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간이는 남을진의 학문에 대해 “고려 시대 경학(經學)을 한 선비로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와 함께 사천 남을진이 으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2. 백인걸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1497~1579]은 중종 대에 도학(道學) 정치를 편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다. 백인걸은 매일 밤 반드시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주자학(朱子學)과 관련된 책을 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도학이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에게 이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위해 노력했다.

3. 송인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암(頤庵) 송인(宋寅)[1517~1584]은 유교에 해박하여 당대의 석학인 이황(李滉)·조식(曺植)·정렴(鄭石+廉)·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이 그를 존경하여 유교 경전에서 의심나거나 상례(喪禮)에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송인에게 묻곤 했다고 한다.

4. 조정기

조선 전기의 문신인 조정기(趙廷機)[1535~1575]는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을 잘하여 선조 대에는 하루에도 세 차례씩 경연(經筵)[국왕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곳]을 열었고, 유신(儒臣)들을 높이 예우하였다. 기대승(奇大升)이 본인의 학설을 따를 정도로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였으며, 저명한 유학자인 성혼을 관직에 적극 추천했다.

5. 정엽

조선 중기의 문신인 수몽(守夢) 정엽(鄭曄)[1563~1625]은 성혼이이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로, 광해군 대에 경연에 나아가 성학(聖學)[국왕이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 및 『근사록(近思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6. 송희업

조선 중기의 문신인 호은(壺隱) 송희업(宋熙業)[1586~1661]은 조수륜(趙守倫)에게 유학을 배웠는데, 그는 성혼의 뛰어난 문인이었다.

7. 최유해

조선 중기의 문신인 묵수당(默守堂) 최유해(崔有海)[1587~1641]는 김현성(金玄成)·조수륜·최립(崔岦)·정구(鄭逑) 등 뛰어난 유학자들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가니 이덕형최유해의 예학(禮學)에 대한 이해를 칭찬하였다.

[교육 기관]

1. 양주향교

양주에서 유교 활동의 중심지는 양주향교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양주목 관아의 동쪽으로 800m[2리] 되는 곳에 양주향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주향교는 조선 개국 직후인 1401년(태종 1) 양주시 유양동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한동안 방치되다가 1610년(광해군 2) 다시 원 위치에 세워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의 유현(儒賢)과 우리나라[신라·고려·조선] 유현의 위패를 모셨고, 매년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에 석전(釋奠)을 지낸다.

2. 서원

양주에서는 조선 시대의 지방 고등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書院)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 시대에 발간된 각종 지리서와 읍지(邑誌)를 보면, 조광조를 모신 도봉서원(道峰書院)[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과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이단상(李端相) 등을 모신 석실서원(石室書院)[현 남양주시 와부읍]이 있다고 적고 있으나, 현재는 서울에 속한 곳이다.

3. 서당

이밖에 양주에는 조선 후기부터 8·15 해방 이전까지 조선 시대의 사립 기초 교육 기관인 서당(書堂)이 약 200여 개 존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교육 기관이 충분치 않고,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아 서당이 여전히 많은 상황이었다. 『양주향교지』[2001]에 의하면, 현재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서당은 삼귀서사(三歸書社)[1685~1720]부터, 신암서당(新菴書堂)[1827~1874], 퇴계서당(退溪書堂)[1945~1958], 옥정서당(玉井書堂)[1945~1965], 모둔재(慕遁齋)[1959~1972] 등 47개이다.

[관련 시설]

조선은 유교 윤리 중 충(忠)과 효(孝)를 백성들에게 적극 권장했으며, 이 윤리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인물들에게는 사당(祠堂)의 액자나 정려(旌閭)[국가가 충신·효자·열녀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집이나 마을 입구에 세운 문]를 내려 포상하였고, 지역 사회와 문중도 기념 시설을 지어 국가로부터 포상 받은 것을 기념하고, 이를 통해 지역과 문중의 결속을 도모하기도 했다. 특히 양주는 수도 한양에서 가까운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을 모신 시설보다 왕조의 교체나 전란과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 많은 편이었다.

1. 사당

충신(忠臣)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는 정절사(旌節祠)[양주시 은현면 봉암리]가 대표적이다. 정절사는 고려 말기의 충신인 남을진조견(趙狷)[1351~1425]을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원래 1712년(숙종 38) 남을진을 모셨는데, 1737년(영조 13) 조견의 위패가 함께 모셔졌다. 그리고 지역 유림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한 끝에 1784년(정조 8) 국가로부터 액자를 하사받았다. 이후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철거되어 약 20년간 방치되다가 1893년(고종 30) 원래의 터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단(壇)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1999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 정려

1) 충절 관련

권절(權節)[1422~1494]은 조선 초기 수양대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해 세칭 생육신(生六臣)의 한 명으로 불렸던 인물인데, 1703년(숙종 29) 정려를 하사받았다. 조선 중기에는 국가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戰亂)이 연이어 발생하여, 국가는 전란이 종료되자 이에 큰 공로를 세우고 사망한 인물들에 대해 포상을 실시했다. 여영원(呂榮元)[1595~1627]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後金)의 군대에 대항해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백병전을 벌였고 전세가 극도로 불리해지자 항복을 거부하고 자결했다. 이에 1745년(영조 21)에 정려를 받았다.

2) 효행 관련

다음 효행 관련 시설을 살펴보자. 유교 사회는 효행을 모든 윤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항목으로 여겼다. 이에 조정에서는 효행의 모범적인 사례를 확인해 해당 인물들을 포상하였다. 최제(崔濟)[1659~1723]는 96세의 장수를 누린 부친과 40년 간 생존한 계모를 한 마음으로 성실한 봉양한 인물로 정려를 하사받았다. 뿐만 아니라 최제 집안에서는 현손인 최혁(崔爀)과 5세손 최규석(崔圭錫)이 정려를 받는 등 3대에 걸쳐 효행과 관련된 정려가 하사되었다. 특히 최규석은 선대의 효행과 최규석 개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세금을 면제받고 3세 추증(追贈)[사후에 명예직을 받는 것]의 특전을 받았다. 최제 가문의 사례는 유교 윤리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국가로부터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 준다.

[현황]

1945년 해방 직후 김창숙(金昌淑) 등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유교 정책에 순응하고 성균관을 대체한 기관으로 만들어진 경학원(經學院)에 참여했던 ‘친일 유림’을 축출하고자, 같은 해 11월 전국 유림 대표 200여 명과 함께 성균관유도회(成均館儒道會) 총본부를 설립한 바 있다. 양주에서도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8월 성균관유도회 양주군지부가 설립되었다. 이후 1981년 7월 구 양주군이 행정 구역 분할에 따라 양주군지부·의정부시지부·동두천시지부·남양주군지부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성균관유도회 양주시지부는 매년 봄가을의 석전을 주관하는 한편, ‘성년의 날’에 시행되는 전통 성년 의례 및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성 교육·한문 교육 등을 실시해 유교 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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