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42 |
---|---|
한자 | 金亨鎭 |
영어공식명칭 | Kim Hyeong-jin |
이칭/별칭 | 金亨振,金元明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선아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형진(金亨鎭)[1861~1898]은 완주군 출신으로 백범 김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가계]
[활동 사항]
김형진은 1895년 5월 황해도 해주에서 김구(金九)를 만나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김구는 1893년 1월 무렵 동학에 입교하여 ‘아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후 김구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안태훈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김구의 인품을 안타깝게 여긴 안태훈의 배려로 1895년 2월에 부모를 모시고 신천군 청계동에 기식하였던 중에 고능선(高能善)의 문하에 수학하며 청나라와 손을 잡고 왜적을 물리칠 결심을 하고 청나라에 가고자 하였다. 이때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김형진을 만나 함께 백두산과 만주를 거쳐 청나라에 갈 계획을 세웠다. 김구와 김형진은 중국 심양(瀋陽)으로 가서 관동연왕(關東燕王) 이극강아(李克康阿)에게 원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96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김구와 함께 가담하여 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에서 포수(砲手)를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강계군(江界郡) 고산리(高山里)를 공격, 무기를 탈취하여 의병들에게 지급하고 강계성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이미 수성(守城)이 완벽하여 공성(攻城) 작전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중 일인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살해하여 김구와 함께 체포령이 내렸으나 무사히 전라북도 금구(金溝)로 귀향하였다. 그러나 1898년 2월 27일 동학의 접주(接主)로 발령받고 금구 일대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김형진은 김구와 함께 하였던 1895년 4월부터 2년간 중국에서 의병 활동에 대해 『노정약기(路程略記)』를 저술하였다. 제주항일기념관에는 김형진이 사용하던 칼과 사령장이 전시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김형진의 저서로는『노정약기(路程略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김형진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