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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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林寺址三尊石佛 |
영어공식명칭 | Buddha Triad at Bongnimsa Temple Site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67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진정환 |
현 소장처 | 전북대학교 박물관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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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봉림사지 삼존석불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
성격 | 불상 |
재질 | 돌 |
소유자 | 전북대학교 박물관 |
관리자 | 전북대학교 박물관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지에 있던 석조삼존불.
[개설]
봉림사지는 완주군 고산면 인봉산에 있는데, 이 삼존불과 함께 오층석탑, 석등 등이 있었던 곳이다. 봉림사지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 군산 시마타니농장[島谷農場]으로 밀반출되었다. 한편 봉림사지 삼존석불은 1960년대 전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되고 있으며, 봉림사지는 2015부터 2017년까지 3차례에 걸쳐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졌다.
[형태]
봉림사지 삼존석불은 대좌[불보살을 모시는 자리]와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 몸 뒤쪽에 둥근 장식물로 표현]를 모두 갖추고 있는 본존불과 좌·우협시 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특징]
봉림사지 삼존석불의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어 통일신라 후기 석불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본존불의 왼쪽 어깨를 덮은 옷자락과 가슴에 띠 매듭이 결합된 편단우견식 착의법[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되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는 형식]은 통일신라 후기 불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인데, 이러한 독특한 형식은 대아리 석불좌상과 음수동 석조약사불좌상 등 완주 일대 이외에 경상북도 안동 옥산사지 마애약사불좌상에서 유일하게 확인된다. 이로써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양식적 원류가 안동 옥산사지 마애불이며, 후백제에 영향을 끼친 이후 조각 유파를 형성할 정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광배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통일신라 양식의 영향이 짙은 본존불과 달리 통일신라 일반적인 광배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백제시대에 조성된 익산 삼기면 연동리 석불좌상 광배 화불과 비슷한 고식의 화불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협시보살상 역시 익산 왕궁면 왕궁리 오층석탑 금동불입상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면서도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 부여 군수리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같은 6세기 후반 보살상의 천의와 같은 X자 천의를 걸치고 있다.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고 천명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했던 만큼,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복고적 요소는 후백제 정권에 의해 차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에서만 보이는 가릉빈가[부처의 소리를 전하는 새로 몸은 새의 형상이고, 얼굴과 팔은 사람의 모습]와 주악천인을 새긴 점은 경상북도 북부 지역 불교 미술품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방형과 팔각형 부재를 결합한 점과 중대석의 뒷면을 조각하지 않은 점은 ‘장식성’을 억제한 후백제 불교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의와 평가]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은 아담하면서 균형 잡힌 9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보이는데, 세부 형식에서는 안동 지역, 팔공산 지역, 문경 지역의 독특한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경상북도 북부 지역 불교 미술품의 특정 형식이 봉림사지 삼존불에 나타나게 된 이유는 그 지역이 견훤의 출생지 혹은 전투를 치른 지역의 조각 유파가 후백제로 유입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편 봉림사지 석조삼존불 광배의 화불이나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고식 형식은 지역 내 토착 조각 유파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