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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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維 |
영어공식명칭 | Jang Yu |
이칭/별칭 | 지국(持國),계곡(谿谷),묵소(默所),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권 |
출생 시기/일시 | 1587년 - 장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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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장유 김직재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 |
몰년 시기/일시 | 1638년 - 장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3월 3일 -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9년 5월 21일 - 장곡동 매꼴마을 유래비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5년 12월 22일 - 장곡동 매꼴공원 인선왕후 좌상 건립 |
출생지 | 선천부 관아 - 평안북도 선천군 |
거주|이주지 | 해장정사 -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68 |
수학지 | 양성당(養性堂)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
묘소|단소 |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조남동 산1-5] |
사당|배향지 | 계간사(谿磵祠) - 전라남도 나주시 송현길 181[석현동 119]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덕수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에서 활동한 조선시대의 문신.
[개설]
장유(張維)[1587~1638]는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파직되어 안산군[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안골]에 내려와 12년을 살았고 말년을 보냈다. 인조반정으로 등용되어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이며 주자학 중심의 학문적 풍토를 비판하고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고조할아버지는 장옥(張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장임중(張任重),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장운익(張雲翼), 어머니는 판윤(判尹)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고, 동생은 덕창군(德昌君) 장신(張紳)이다. 아들 장선징(張善澂)과 딸 인선왕후(仁宣王后)를 두었다.
[활동 사항]
장유는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조선 중기 학자 김장생의 양성당(養性堂)에서 정홍명(鄭弘溟), 박미(朴瀰), 나해봉(羅海鳳) 등과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兼說書)를 거쳐 검열(檢閱), 주서(注書) 등을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의 무옥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고조부 장옥의 별장이 있는 안산군[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안골]으로 낙향하여 12년간을 살았는데, 집을 해장정사(海莊精舍)라 하고 「해장정사기」를 남겼다. 이 시기 친구들의 권유로 사부(詞賦), 운문(韻文), 고문(古文)을 모아 총 4권의 『묵소고갑(默所稿甲)』을 썼다.
장유는 외아들 장선징과 인선왕후를 낳았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과 예조·이조의 낭관(郎官)을 지내고 그해 8월에는 지제교(知製敎) 겸 교서교리(校書校理)가 되었다. 9월에 암행어사로 호남에 나가 지방 행정의 크고 작은 폐단을 세밀하게 살펴 보고하였다. 1624년(인조 2) 대사성과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자 공주로 인조를 호종하여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역임하고,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나만갑(羅萬甲)을 구하다 나주목사로 좌천되고 1630년(인조 8) 대사헌, 좌부빈객(左副賓客),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국혼으로 딸이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조선 17대 왕 효종]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해졌다. 1631년(인조 9)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려고 하자 대사헌으로 추숭 불가론의 입장을 밝히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인조에게 올렸다. 1635년(인조 13) 처숙부(妻叔父)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1570~1652]에게 부탁하여 아버지 장운익의 묘비명을 지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어머니의 부음으로 안산군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1637년(인조 15)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8차례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어머니의 장례 후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당대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적 경직성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포함한 학문적 다양성을 추구하였다. 「해장정사기」에 언급한 “노장 현교를 좋아하고 삼교를 연구했다.”라는 기록처럼 천문, 지리, 의술,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 칭호를 받았다. 또한 일찍이 양명학을 접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양명학적 사고방식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장유를 이식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아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은 “한구(韓歐)[한유와 구양수]를 넘겨다보았으면서도 그 의리(義理)는 정(程子)·주(朱子)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상하(上下) 5~6백 년 사이에 공과 그 경중을 겨룰 이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양명학을 했다고 비판되었지만 현종의 외할아버지로서 조선 왕실에서 존숭되었기 때문에 유작은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양명학자 정제두(鄭齊斗)는 장유의 글을 보고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도 장유의 『계곡만필(谿谷漫筆)』을 통해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傳習錄)』에 관심을 가졌다. 장유는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현재 『계곡만필』, 『계곡집(谿谷集)』,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수인로 2164-48에 있다. 원래 묘는 상양산 자락의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산69-2 덕수 장씨(德水張氏) 세장지(世葬地)에 썼다가 1664년(현종 5) 현종의 명으로 현재의 조남동 장군재마을로 이장하였다.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계간사(谿磵祠)에 동문인 나해봉과 배향되었다. 조선 22대 왕 정조는 1797년(정조 21) 8월 행차[행행(行幸)] 때 안산관아에 머물면서 장유 묘에 치제(致祭)를 명하고 어제(御製)로 장유와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의 치제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