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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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鉤島 |
영어공식명칭 | Okgudo |
이칭/별칭 | 석을주도(石乙注烏),석줄도(石茁島),석옥귀도(石玉龜島),돌주리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손승호 |
해당 지역 소재지 | 옥구공원 - 경기 시흥시 오이도로 58[정왕동 87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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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있던 섬이었던 지역.
[개설]
옥구도(玉鉤島)는 원래 지금의 시흥시 앞바다에 있던 섬이었지만, 도시 발달 과정에서 매립 공사가 진행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경기만의 섬이었던 옥구도는 1920년대 시흥에서 군자염전을 조성하면서 간척지로 육지화되었다. 1920년대에 군자염전이 조성되고 소금을 생산하면서 일본에서 온 염전 기술자들이 머물던 숙소가 옥구도에 있었으며, 일본인을 위한 학교도 건립되었다. 옥구도에는 일본인 21가구가 거주했으며, 일제의 정책에 의해 옥구도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는 옥구도의 동쪽만 내륙과 연결되었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육지와 옥구도 사이는 군자염전으로 남아 있었고, 염전이 있던 동쪽 사면에는 옥귀라는 자연 마을이 있었다. 이후 시화국가산업단지 개발을 위한 매립 공사가 1988년에 마무리되면서 옥구도의 서쪽도 육지화하였다.
[명칭 유래]
지금의 옥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을주도(石乙注烏)로, 『대동지지』에는 석줄도(石茁島)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1843년의 『경기지(京畿誌)』 「안산군(安山郡)」에는 석옥귀도(石玉龜島)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옥구도로 표기가 바뀐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은 옥구도를 ‘돌주리'라 부르는데, 돌주리는 석을주도(石乙注烏)의 '석(石)'과 '을(乙)'을 한 글자로 간주하면 우리 고유의 글자인 '돌(乭)'이 되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자연환경]
육지와 오이도 사이에 자리했던 옥구도는 동서 방향보다 남북 방향의 길이가 다소 긴 타원의 형태였다. 섬은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산지의 높이는 약 95m에 달했고, 산지의 형상은 둥근 종 모양이었다. 육지와 연결된 이후에도 자연 생태계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지금은 서해안 매립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간척 사업 이후 옥구도는 내륙 해안의 구릉으로 바뀌었다.
[현황]
옥구도는 1998년 초까지만 해도 해안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민간인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시흥시에서는 2000년 12월 10일 옥구도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조성 당시에는 산책로가 개설되어 있는 시흥시의 가장 큰 규모의 공원이었으나 2018년 기준으로 시흥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다. 옥구도 일대에 조성된 공원은 고향 동산·무궁화 동산·습지원·연꽃단지 등으로 구성된 환경친화적 공원이며, 시민들이 찾는 휴식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옥구공원은 자연 학습장으로도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2010년에는 경기 정원문화박람회가 옥구공원에서 열렸다. 옥구도 서쪽의 매립지는 배곧 신도시로 개발되며, 도시 지원 시설을 비롯하여 연구 및 개발 관련 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