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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 한적한 교외 지역이었던 시흥은 1977년 서울의 철거민들이 복음자리마을을 조성하면서 철거 이주민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는 한편 정부의 도시 빈민 주거 정책 부재를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복음자리마을 옆에 들어서기 시작한 신천동 83번지 무허가 판자촌은 1993년 화재 사건을 계기로 도시 개발에 따르는 철거 투쟁이라는 그림자를 분명하게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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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장현동·능곡동에 걸쳐 있는 산. 군자봉에는 ‘세 자 세 치가 깎인’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유씨 집안의 여종 하나가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죽은 여종의 아들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스님에게 풍수를 배우다가 스님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풍수에 조예가 깊은 스님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에 유씨 집안에서 그를 불러 가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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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부터 경기도 시흥 지역을 상징했던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의 흥망성쇠.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경기도 시흥의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양질의 소금 산지로 각광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군자염전과 소래염전은 시흥 지역을 상징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천일염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도시의 팽창 욕구가 커지면서 결국 시흥 지역의 염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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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경기도 시흥 지역의 역사. 개항 이래 조선은 외세의 개입과 수탈 속에서 쇠락해 갔다. 개화파가 주도한 갑오개혁(1894~1896)과 대한제국의 선포를 통해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자강 부흥을 노렸으나, 이미 기운 국운을 되돌리기 어려웠었다. 결국 1906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면서 조선 사회의 근대적 개혁은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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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蘇萊)’라는 명칭은 인천광역시, 부천시, 시흥시에서 모두 사용되고 있지만 시흥시에는 소래산을 비롯해 소래염전, 소래산 편사 놀이, 소래문학회, 소래초등학교 등 시흥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 ‘소래’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소래’에 대한 지역민의 애정과 애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행정구역상 소래산은 현재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과 시흥시 대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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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 북쪽의 소래산과 서남쪽의 군자봉 사이로 흐르는 은행천과 보통천이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 두 하천에서 운반되어온 퇴적물이 매화동, 은행동, 미산동, 도창동, 하상동, 하중동 일대에 약 150만 평[약 5㎢]의 커다란 벌판을 형성해 놓았다. 조선시대에 간석지[개펄]였던 이곳에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호조방죽을 축조하여 농경지로 활용하였는데, 그 들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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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마을 170세대가 1978년 출자금을 모아 설립한 금융 관련 협동조합. 복음신용협동조합은 복음자리마을 이주 과정에서 빌린 융자금을 갚고, 복음자리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1978년 5월에 설립되었다. 철거 이주민 170세대가 형편대로 출자하였으며 출자금의 10배 한도 내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복음신용협동조합은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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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를 중심으로 진행된 철거 이주민의 지역 복지 주민 운동. 복음자리 빈민 운동은 도시 철거민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조차 없었던 1970~1980년대 경기도 시흥 지역에 집단 이주를 성사시킨 자생적 주민 운동이다. 제정구(諸廷坵)와 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가 주민들과 함께 경제적 자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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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군 소래면 신천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복음자리마을은 1977년부터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 주민들이 집단 이주해 형성되었다. 도시 빈민으로 살면서 가난에 찌들어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했던 복음자리마을 주민들은 제정구(諸廷坵)와 정일우(鄭日祐)[John Vincent Daly] 신부 등 헌신적으로 마을 공동체 운동을 펼친 관계자들과 함께 연대하여 자립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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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무단 철거 직전의 소래염전 소금창고를 박물관, 미술관, 체험 학습관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벌인 운동. 소래염전 부지의 소유주였던 (주)성담이 2006년 6월 4일 현장에 남아 있던 소금창고 40동 가운데 38동을 방화 등으로 무단 철거하였다. 이에 시흥 지역 시민 단체와 문화 연대 등이 ‘구염전 소금창고 무단철거 항의 시민행동’을 조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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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 시민이 소래산 절개 도로 공사를 저지시킨 운동. 한국도로공사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소래산 산마루 일부를 절개하여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하자 소래산을 지키려는 시흥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공사 저지 운동을 펼쳤다. 시흥 시민들은 1995년 가을부터 1996년 봄까지 약 179일 간의 현장 농성, 시민 서명 운동, 시민 공청회,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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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에서 삶이나 자연에 대한 감흥과 사상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문학 장르. 경기도 시흥시에서의 문학 활동은 주로 시 창작 및 발표로 이루어지고 있다. 시흥시의 대표적인 문학지인 『시향문학』, 『소래문학』, 『시흥문학』 등에는 수필도 일부 게재되지만 대부분 시 작품이 게재되고 있다. 이들 시는 다른 시처럼 일반적인 내용이지만 시흥과 관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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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 시민들이 정치·경제·사회 등 각종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펼치는 각종 활동. 시민운동은 시민들이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대한 활동을 하는 정치 참여의 형태를 말하며 시민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전제로 한다. 주로 시민 단체를 만들거나 가입하여 활동하는 형태로 참여하게 된다. 인권, 환경, 평화, 정치 개혁, 행정 감시, 제도 개선 등이 주된 내용이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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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는 자연과 도시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이다. 1989년 시흥군에서 시흥시로 승격된 이후 광명시, 안양시, 안산시, 군포시, 부천시, 인천광역시 등 주변 도시의 중심에서 나름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 오고 있다. 시흥시는 포동, 월곶동, 정왕동 오이도까지 이어지는 서해의 바다 풍경과 갯벌 습지가 생태학적 보고로 알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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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의 방편으로 시작한 시흥의 근대식 교육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이라는 굴절을 겪으면서도 광복 이후 양적·질적으로 팽창해 왔다. 시흥시 교육의 발전은 시흥 사람들의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가능했지만, 시흥시의 근현대 교육은 교육 공급이 교육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시흥시 교육의 발전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앞으로도 풀어가야 할 숙제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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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경기도 시흥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 시흥은 서울 남서쪽 농촌 지역에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역이 변화하였고, 면 중심의 식민지 행정 통제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 때는 시흥의 주민들도 적극 만세 시위를 벌여 독립의 희망을 표출하였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가 계속되면서 70%가 지역 토박이인 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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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능곡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 진덕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연혁이 전해지지 않아 절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폐사된 후 1940년 절터에서 조선 말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덕사 석조 약사불 좌상(鎭德寺石彫藥師佛坐像)이 출토되었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 절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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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를 연결하여 쌓았던 방죽. 호조방죽(戶曹-)은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를 이어 축조되었던 길이 약 720m의 인공 둑이다. 바다로서 개펄이었던 이곳에 조선 경종 원년인 1721년에 둑을 완공하여 농경지로 개간한 것이다. 이 둑은 과거 인천부와 안산군을 연결하는 교통로 구실을 하였으며, 국도39호선 구도로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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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의 보통천과 은행천을 끼고 형성된 평야 지대. 호조벌을 탄생시킨 것은 바다를 가로막은 제방인데 바로 호조방죽이다. 호조방죽은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를 잇는 길이 약 720m의 인공 둑이다. 개펄이었던 이곳에 1721년(경종 1년) 둑을 완공하여 농경지로 개간하였다. 이 둑은 과거 인천과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로 구실을 하였으며,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