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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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김매기를 공동 작업으로 수행하던 마을 단위의 조직.
[개설]
두레는 조선 후기 이앙법의 보급과 더불어 새롭게 출현한 공동 노동 조직이다. 1899년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를 제작한 ‘향교골 두레’는 서산 지역에 두레 노동이 폭넓게 확산되었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서산 지역은 벼농사 지대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마을에서 두레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김매기를 했다. 두레는 자연 마을 단위로 조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하여 모내기를 마친 뒤 한 달 남짓 지나면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열고 두레의 역원과 품삯, 작업 순서 등을 결정한다. 이를 ‘두레 공사한다.’고 한다. 서산 지역의 두레는 제초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970년대 이전에 대부분 소멸되었다.
[역원]
두레의 역원과 명칭은 마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1899년 두레의 역원이 기록된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에는 영좌(領座), 이영좌(二領座), 삼영좌(三領座), 공원(公員), 유사(有司), 문서(文書), 각총영좌(各摠領座) 등이 등장하고 있어 19세기 후반 서산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던 두레의 역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영좌란 두레의 총책임자로서 나이가 지긋하고 두레꾼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추대되는 것이 통례이다. 마을에 따라서는 좌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원은 영좌를 보좌하여 두레꾼을 이끌고 실질적으로 김매기를 주도하는 역원으로, 서산 지역에서는 공원이란 명칭이 폭넓게 사용된다. 따라서 공원은 농사일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유사는 새참과 식사를 담당하는 역원이고, 문서는 두레의 작업 현황과 품값을 문서에 기록하는 역원이며, 각총영좌는 혼인을 하지 않은 총각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노총각을 지칭한다. 속칭 총각대방이라고 한다. 이밖에 두레에는 풍물 조직이 있다. 두레 풍물은 기치(旗幟)로 영기와 농기[용대기]가 있고, 풍물은 꽹과리·징·장구·북 외에 쇄납이나 벅구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김매기]
두레의 김매기는 대개 세 번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이른바 아시매기, 이듬매기, 만물[세벌매기] 등이 그것이다. 다만 마을에 따라서는 아시와 이듬만 두레에서 매고, 만물은 개별적으로 품을 사서 하거나 손수 하기도 한다. 김을 매는 방법은 아시와 이듬은 논에 댄 물을 뺀 다음 대개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고, 만물은 손으로 제초 작업을 한다.
[두레먹이]
김매기를 마치면 칠월 칠석이나 백중 무렵에 날을 잡아 두레를 총결산하는 모임을 갖는다. 이를 ‘두레 먹는다’고 한다. 먼저 마을의 구성원들은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공터에 모여서 품값을 결산한다. 소유한 논이 적어 일을 더 한 사람은 품값을 찾아가고, 반대로 넓은 땅을 소유한 농가에서는 품값을 냈다. 남은 비용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는데, 이 돈으로 통돼지를 잡는 등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온 마을 사람이 흥겹게 풍물놀이를 벌이며 진종일 동네잔치를 벌였다.
[의의]
김매기는 벼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농사일이다. 만일 때를 놓치면 풀이 웃자라 벼의 성장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이처럼 단시간 집중적으로 필요한 집약적 노동력의 문제를 마을 단위에서 공동으로 대응했던 공동체 문화의 소산이 두레다. 제초제나 농기계가 없어 모든 논의 김매기를 손으로 해결해야 했던 시절에 두레는 품앗이와 더불어 상부상조 정신의 백미를 보여 준다. 아울러 김매기를 마친 뒤에 열리는 두레먹이를 통해 온 마을 사람이 하나가 됨으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끈끈한 일체감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