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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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雲澤 |
영어음역 | Gim Untaek |
이칭/별칭 | 중행(仲行),백운헌(百雲軒),충정(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춘진 |
출생 시기/일시 | 1673년 - 김운택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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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99년 -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04년 -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17년 - 평안도감진어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19년 - 위패 사건으로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722년 - 신임사화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722년 - 김운택 졸 |
추모 시기/일시 | 1725년 - 복관 |
추모 시기/일시 | 1779년 - 정간 시호 받음, 이조판서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882년 - 김운택 신도비 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고남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광산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행(仲行), 호는 백운헌(百雲軒). 김장생(金長生)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金萬基)[1633~1687]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김진구(金鎭龜)[1651~1704]이고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이광직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운택(金雲澤)[1673~1722]은 1699년(숙종 2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4년(숙종 30)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에 수록된 그의 졸기에는 “임금이 시권(試券)을 뜯어보고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쳐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17년(숙종 43)에 평안도감진어사(平安道監賑御史)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1719년(숙종 45) 위패 사건으로 부수찬 조상건(趙尙健)과 함께 파직되었다.
얼마 후 승지로 기용되어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 부제학, 대사성, 호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한 뒤 영변현으로 유배되었다. 이런 와중에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 왔다는 목호룡(睦虎龍)[1684~1724]의 고발로 잡혀 들어가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들과 함께 장살되었다.
[묘소]
묘소는 서산시 성연면 고남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운택은 영조의 즉위년인 1725년에 복관되고 이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1779년(정조 3) 정간(貞簡) 시호를 받았으나, 홍문관의 요청으로 시호에 대한 논의를 거쳐 1782년(정조 6) 충정(忠貞)으로 바뀌었다. 서산시 성연면 고남리에는 1882년(고종 19)에 건립된 김운택 신도비가 있다. 화강암을 깎아 장방형 비좌에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를 올린 형태이다. 크기는 높이 186㎝, 너비 53㎝, 두께 45㎝이다. 비신에는 ‘유명조선국호조참판증이조판서시충정김공신도비(有明朝鮮國戶曹參判贈吏曹判書諡忠貞金公神道碑)’라고 적혀 있고, 4면 전체에 김운택의 행적과 가계에 대해 적었다. 비문은 윤봉구(尹鳳九)[1681~1767]가 짓고, 6세손인 김봉수(金鳳洙)가 윤봉구와 추기(追記)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