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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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寅浩 |
영어음역 | Bak Inho |
이칭/별칭 | 용호(龍浩),도일(道一),춘암(春菴) |
분야 | 종교/신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해준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 박인호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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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동학에 입도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0년 - 동학의 경도주(敬道主)로 교단 재건에 힘씀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천도교 제4대 대도주 됨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만세 운동 경비 지원, 3·1 만세 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하여 심문을 당함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 박인호 졸 |
출생지 | 덕산군 장촌면 막동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
성격 | 천도교 지도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천도교 제4대 대도주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활동한 천도교 지도자.
[가계]
본관은 밀양. 초명은 박용호(朴龍浩), 자는 도일(道一), 호는 춘암(春菴)이다.
[활동 사항]
박인호(朴寅浩)[1855~1940]는 충청남도 덕산군 장촌면 막동[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지가서(地家書)[풍수지리에 근거를 두고 묏자리나 집터 따위의 좋고 나쁨을 알아보는 책] 및 신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사회적 병폐와 모순에 눈을 떠 공부를 그만두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3년(고종 20) 29세 때 동학에 입도하여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공주 가섭사(迦葉寺)에 들어가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지도자 교육을 받았다. 그 뒤 북접 교단의 중심인물이 되어 박희인과 함께 서산을 포함한 충청도 지역에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벌였다. 동학이 자리를 잡자 신창·해미·홍주·서산·태안·안면도 등지에서 농민군을 규합하여 조직으로 재편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서산과 태안은 다른 지역에 비해 동학의 조직 기반이 탄탄하고 많은 접주급 인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박인호는 전라도 삼례에서 이루어진 교조 신원 운동과 동학교도 광화문 복합 상소 등에 참여하였고, 보은 장내리 시위에 많은 교도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호서 지방에서 박희인과 더불어 기포·덕산·예산·신리원(新里院)·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높은 전과를 올렸으나 신무기로 반격해 오는 일본군에 패하여 도피하였다. 1900년 동학의 경도주(敬道主)가 되어 손병희를 도와 동학 재건에 힘쓰는 한편, 진보회(進步會)를 통해 갑진 개화 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활동하였다.
1908년(순종 2) 1월에는 천도교 제4대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제3대 교주 손병희의 지도 아래 천도교 중흥에 힘써 교세를 크게 일으켰다. 1919년 2월 민족 대표 손병희의 명을 받아 천도교 보관금으로 3·1 운동을 지원하였고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찍어 전국에 배포하는 등 독립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3·1 만세 운동 때 중앙 지도체 49인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8년에는 독립을 기원하는 천도교의 비밀 기도회인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하였다는 이유로 병석에서 심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