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46 |
---|---|
한자 | 崔致遠 |
영어음역 | Choe Chiwon |
이칭/별칭 | 고운(孤雲),해운(海雲),문창후(文昌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해준 |
출생 시기/일시 | 857년 - 최치원 생 |
---|---|
활동 시기/일시 | 868년 - 당으로 유학 |
활동 시기/일시 | 879년 -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음 |
활동 시기/일시 | 885년 -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887년 - 부성군 태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893년 - 하정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894년 - 시무책 작성 |
추모 시기/일시 | 1020년 -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021년 - 문창후(文昌候)에 추시되어 문묘에 배향됨 |
출생지 | 사량부 - 경상북도 경주시 |
거주|이주지 | 해인사 - 경상남도 합천 |
부임|활동지 | 부성군 - 충청남도 서산시 |
사당|배향지 | 무성서원 -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
사당|배향지 | 서악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
사당|배향지 | 백연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
사당|배향지 | 고운영당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산23-2 |
사당|배향지 | 계림사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3동 2132-5 |
사당|배향지 | 부성사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 645-2 |
성격 | 학자|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아찬 |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성군[현 서산시] 태수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이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활동 사항]
최치원은 신라 육두품 출신 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다. 868년(경문왕 8) 당나라로 유학하여 874년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많은 시문을 지었고,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885년 당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으며,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여서는 당시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 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자청하여 대산군(大山郡)[전라북도 태인], 천령군(天嶺郡)[경상남도 함양]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887년(진성여왕 1)에 비로소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부임하여 893년 진성여왕이 하정사로 삼아 당에 파견하기 전까지 7년 동안을 재임하였다. 특히 최치원이 오랜 기간 동안 부성군의 지방관으로 머무른 데에는 신라 왕실에서의 특별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서산 일대는 서해안에 접경하여 당과 교류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고, 당시 국제적인 인재로 활약했던 최치원의 교량적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서산에는 아직도 최치원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최치원이 치성(治城) 또는 진성(陳城)으로 이용하였다고 전해지는 부성산성(富城山城)과 집무를 보았다고 전해지는 관아 터, 옥터밭[獄地田]이 있다. 또 최치원이 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서광사(瑞光寺), 가야산 산중 용현리에 강당을 마련하고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강당골 등이 그것이다. 한편 그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부성사(富城祠) 내에는 그의 ‘과선각(過仙閣)’ 현판도 보존되어 있다.
최치원은 부성태수를 마치고 함양태수를 지내고 있던 894년(진성여왕 8)에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는 등 당시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으나, 결국 정치적·신분적 한계로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40여 세의 나이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후, 전국을 방랑하다가 말년에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고 전한다.
[학문과 저술]
최치원의 유(儒)·불(佛)·선(仙) 통합 사상은 고려 시대의 유학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금체시(今體詩)』,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사륙집(四六集)』 등이 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이 있다. 불교에 관련된 저술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석이정전(釋利貞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상비명』 뿐이다. 그 외는 『동문선(東文選)』에 시문이 일부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1021년(현종 12)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서산 지역에도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부성사가 건립되었는데, 명칭은 서산의 옛 이름이자 최치원이 태수를 지냈던 유서를 따라 붙여졌다. 또한 최치원을 비롯한 서산의 다섯 인물을 기리기 위한 오현각이 1913년 부성산성 내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