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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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왕조의 지방지배체제는 ‘갑오·을미개혁’ 이후 커다란 변화를 거쳤다.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1895년 부(府)·군(郡)·현(縣)제를 일체 폐지하여 군으로서 명칭을 통일하고 각 군을 군세(郡勢)에 따라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그런 뒤 군에는 군수를, 면에는 면장을 두었다. 1897년에는 좌수의 명칭을 향장(鄕長)으로 바꾸고, 호장, 이방 이하 각 이속들을 해방하였다. 군에는 군수 1인, 향장 1인, 서기(書記) 2·3인, 고원(雇員) 약간을 두었다. 뒤에 향장을 폐지하고 군주사(郡主事) 1인을 두었으며, 리에는 이장(里長)을 두었다.
1870년대부터 통감부가 설치되는 1910년까지 서산 지역에서 군수를 지낸 인물은 26명이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은 1870년 경복궁 중건 시 ‘토목공 두령’을 지내다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군수가 된 오병선(吳秉善), 1876년에 군수로 부임하여 자신의 녹봉을 털어 기근민들을 구제했다는 박규동(朴奎東), 1884년에 군수로 부임한 이범서(李範敍), 1885년에 서산군수를 역임했다가 이후 개항기 탁지부 대신을 역임하고 1925년 이왕직(李王職) 장관을 역임했던 민영기(閔泳綺),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 군수로 부임했다가 동학군에 피살당한 박정기(朴錠基), 1894년 박정기의 후임 겸 토포사(討捕使)로서 농민전쟁의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성하영(成夏泳), 1900년 중추원 의관으로 서임된 후 같은 해 서산군수로 부임한 이희열(李希烈)의 장남 이기석(李基奭), 1909년 서산군수과 1911년 해미군수를 역임한 이희열의 셋째 아들 이기상(李基祥) 등이었다. 이희열의 아들인 이기석, 이기상, 이기승(李基升)은 구한말 군수를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9월에는 지방관제 칙령 제357호 실시에 따라 군에는 군수, 군서기, 기수(技手)[판임관]를 두고, 군수는 도지사의 지휘 감독에 따라 법령을 집행하였으며, 관내 행정 사무를 장악하고, 부하 관리를 감독하였다. 군서기와 기수는 군수의 지휘에 따라 서무(庶務)와 기술(技術) 업무에 종사하였으며, 군 내에는 서무(庶務)와 재무(財務) 2계를 두고, 계에는 주임을 두었다. 1922년에는 군의 부서를 다시 삼과로 나누고 서무과, 권업과(勸業課), 재무과를 두었으며, 각 과에는 과장 1인을 두어 과원을 지휘하였다. 1924년에 다시 3과제를 폐지하고 서무와 재무 2과제를 실시하였으며, 과장을 주임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군면폐합 이후 서산군수를 지낸 인물은 1913년 경부(警部)에서 서산군수로 부임 한 권익채(權益采), 1917년 공주군수에서 서산군수로 부임한 지희열(池喜烈), 1922년 부여군수에서 서산군수로 부임한 김창수(金昌洙), 1913년 당진군수에서 서산군수로 부임한 원은상(元殷常), 1925년 홍성군수에서 서산군수로 부임한 이민영(李敏寧)이 있다.
일제 강점기 서산군의 대표적인 공직기구나 단체는 세무사무 보조 지방위원회[1901-1910], 군정 자문 군참사(郡參事)[1909-1919], 면정 자문 면협의회[1920-1945], 도정자문 및 의결기구 도평의회[1920-1945], 학사 사무 보조 학무위원회[1908-?], 학교비 사무 자문 학교평의회[1920-1945], 향교운영 자문 향교장의회의(鄕校掌議會議)[1920-1945], 진흥회[1916-?], 양잠조합, 통합 조직, 농사개량 및 농정 보조 농회[1926-1945], 금융조합[1908-1945], 서산 소방조, 적십자사 서산위원부, 애국부인회 서산위원부, 서산 고아구제회[1918-?] 등이었다.
국세 조사에 따르면 1930년 서산의 총인구는 14만 5841명이었으며, 인구가 많았던 면은 태안면[10,347명], 해미면[9,867명], 서산면[9,795명], 운산면[9,670명], 안면면[9,625명] 등이었다. 1930년 서산 지역 인구의 직업별 분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했고, 상대적으로 어업 인구가 많았으며, 반면에 상업과 공업 인구는 타 지역에 비해 그 비율이 낮았던 것이 특징이다. 공업 인구 중 남자의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는데, 이는 서산군에 염업 노동자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많았는데, 이는 해운업[여객선] 종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행정구역 개편]
일제는 1914년 행정비용 감축, 행정 효율 증진 등을 이유로 군면폐합을 단행하였다. ‘군면폐합(郡面廢合)’의 이전 시기 서산군은 16개 면, 해미군은 9개 면, 태안군은 13개 면을 거느린 독립적인 행정구역이었다. 하지만 군·면폐합 이후 서산군은 ① 서산군에 속했던 16개면 전체, ② 태안군에 속했던 14개 면 중 9개 면[부내면, 남면, 근서면, 원일도면, 원이도면, 북일도면, 북이도면, 동일도면, 동이도면], ③ 해미군에 속했던 9개면 중 6개 면[동면, 남면, 북이도면, 일도면, 염솔면, 서면], ④ 홍성군의 일부 면[고북면 일부]을 합하여 관할 구역 내에 20개의 면을 거느린 충청남도 최대의 행정 군으로 발전했다. 개항기 세 군현의 읍치지역은 서산군 대사동면(大寺洞面)[동문리 등 9개 리], 해미군 동면(東面)[성내리 등 14개 동리], 태안군 군내면(郡內面)[동문외리 등 13개 리]이었다.
〈표〉GC04100443_01_군·면폐합 이전 서산·태안·해미군의 면 명칭
군·면폐합 이후 조선면제(朝鮮面制)가 실시되는 1917년 서령면이 서산면으로, 지성면이 해미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2년에는 서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시기 서산군은 충청남도 최대를 자랑하였으나 해방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관할 구역이 점차 축소되었다.
[경찰기관]
1895년 지방제도가 개정되면서 경찰행정의 사무는 군수로부터 분리되어 별개의 ‘역소(役所)’에서 담당하기 시작했다. 1904년 ‘한일협약’이 성립되면서 일본인 순사 1인을 순교청에 두어 경찰사무의 고문으로 삼았으며, 1906년 12월에는 순교청을 경무분파소로 개칭하였다. 1908년 1월에는 일본인 보좌원을 폐지하고 곧바로 한국인을 순사나 순사보로 삼았다. 이때 경무분파소를 순사주재소로 변경하였다. 이후 통감부는 1909년 11월 순사주재소를 폐지한 뒤 서산경찰서를 서산읍에 설치하고 서장(署長)을 배치하였으며, 서산, 해미, 태안에는 순사주재소를 두어 경찰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0년 6월에는 경찰권을 일본 정부에 위탁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안면도와 중성 두 곳에 주재소를 증설하였다.
강점기 이후 일제는 1911년 9월 안흥과 구도 두 곳에 주재소를 두었으며, 1914년 3월에는 여미와 중리에 주재소를 증설하였다. 같은 달 군면폐합(郡面廢合)에 따라 당진경찰서 관할의 천의주재소가 서산경찰서 소속으로 바뀌었다. 1918년에 이르러서는 특수한 주재소에 판임경관(判任警官)을 배치하였다. 같은 해 3월 순사주재소 및 출장소를 모두 경찰관주재소, 혹은 경찰관출장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3·1운동 이후 시기인 1919년 8월에는 칙령 제391호에 의거하여 기존의 ‘총독부경찰관서관제’를 폐지하고, 경찰행정사무 권한을 도지사에게 넘기고, 그 관직 명칭을 도경시, 도경부, 도경부보, 도순사로 개칭하고, 조선인 순사보의 명칭을 폐기하여 일체를 도순사로 개칭하였다. 1920년 9월에는 태안주재소에 경부보를 배치하고, 이보다 앞선 7월 관하 20개면내의 관할 구역을 변경하였다.
[교통]
서산 지역은 일제 강점기 철도나 1등 국도가 지나지 않는 교통의 사각지대였다. 1927년 서산-홍성간 2등도로, 서산-삽교역간 3등도로, 서산-태안간 3등도로에 하루 한두번꼴로 자동차가 왕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산군을 통과하는 중심 도로는 2등도로[도청 관리, 폭 3칸]인 서산-군산선이었다. 이 도로는 서산 읍내에서 음암[수석리], 해미, 고북, 갈산을 거쳐 홍성에 이르는 도로였는데 1913년에 개·수축되었다. 1926년 서산군이 직접 관리한 3등도로[폭 2칸]는, 서산읍내에서 인지와 팔봉을 거쳐 태안 동문리에 이르는 ‘서산-태안선’, 서산읍내에서 음암[상홍리]과 운산 수당리에 이르는 ‘서산-당진선’, 등외(等外) 도로로는 서산읍내, 덕지천리, 해미 귀밀리, 억대리에 이르는 ‘서산-해미선’, 팔봉 어송리에서 호리[구도], 이북면 청산리에, 마산리에 이르는 ‘서산-구도선’, 기타 서산-부석선, 서산-성연선, 서산-천의선, 서산-대산선, 서산-대호지선, 성연-천의선, 대호지-천의선, 지곡-구도선, 정미-당진선, 정미-운산선, 해미-운산선, 해미-덕산선, 태안-해미선, 태안-안흥선, 태안-안면선, 태안-소원선, 태안-이북선, 태안-구도선, 소원-원북선, 부석-태안선, 운산-삽교선 등이었다. 이외에 서산 지역에는 1926년 면과 면, 혹은 읍·면과 포구를 잇는 면 관리의 등외도로가 곳곳에 개설되어 있었다.
내포라는 지명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산 지역에는 일찍부터 포구가 발달하여 인천 등지와의 교통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1920년대 중반 기항포(奇航浦)는 서산 지역에 19개소가 있었는데 당시 가장 번성했던 포구는 팔봉면 호리의 구도포, 성연면 면소재지인 명천리의 명천[창말]포, 지곡면 화천리의 원천포, 대산면 삼길리의 삼길포, 서산면의 덕지천포,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항, 팔봉면 어송리의 창포, 정미면 천의리의 천의포, 해미면 개삼포, 소원면 신덕리의 후포 등이었다. 회고에 의하면 서산과 당진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은 주로 명천포를 통해 인천이나 서울로 운반되었으며, 덕적도나 자월도에서 생산되는 새우젓 등도 주로 이곳에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일제시기 서산에는 도선장이 13개가 있었는데, 도선장이 가장 많았던 곳은 안면도[6곳]와 대산면이었다. 1927년 구도-인천, 성연-인천간 발동선이 한 달에 10회, 구도 안흥항에는 인천과 목포를 오가는 조선우선(朝鮮郵船)이 한 달에 6회씩 경유하여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날랐다. 1940년 6월에는 서산읍 양대리 들장에 서산항이 완공되었으며, 곧이어 서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정기 연락선[삼화해운사]이 개통되었다.
[대지주]
1908년 서산, 태안, 해미의 경지면적을 보면 밭에 비해 논의 분포가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점, 그리고 초생지와 사적지가 많았다는 점 등이 주목된다. 서산 지역의 이런 미간 토지들은 개항 이후 염전 경영과 상업, 고리대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농층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시 991,740㎡ 이상의 토지를 경영하던 서산 지역의 대지주들은 대부분 이런 경로를 통해 토지를 축적한 것이다.
『서산군지(瑞山郡誌)』[1927]에는 「빈부정도급분포상황표(貧富程度及分布狀況表)」와 「소유토지면적별인원표(所有土地面積別人員表)」가 실려 있는데, 위의 집계에 따르면 1925년 991,740㎡ 이상의 대토지를 소유한 서산 지역의 지주는 310명, 1만 원 이상의 자산가는 254명이었다. 1925년 말 집계와 앞서 소개한 1930년 말의 집계를 비교하면 991,740㎡ 이상의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5년 사이에 무려 22명 이상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1925년에 서산군 내에 694,218㎡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는 조선인 2명, 일본인 1명이었으며, 495,870㎡ 이상을 소유한 지주수도 9명에 불과하였다. 이는 산미증식계획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토지 집중현상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서산 지역의 경우 마름의 숫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서산군에 부재지주, 특히 경성 소재 지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표〉GC04100443_02_일제하 서산군의 대지주 분포 현황 (1930년 말)
서산군의 대지주들은 지주 경영 이외에 농외 투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농외투자 지주들은 모두 태안군 남문리에 거주하던 지주였는데 백남복, 이기승은 예산 성씨 가문에서 설립한 호서은행과 충남제사에 상당량의 자본을 투자하였다. 또한 1930년대 후반에 4개 회사의 사장직을 역임한 이영진[이기석의 장남]은 정부수립 후 초대 충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서산 지역 대지주들의 농외투자는 ‘자본의 분산’을 통한 ‘자본운영의 효율성 제고’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유력한 재테크의 기법이었다. 일부 대지주 가운데는 은행돈을 끌어 쓰는 등 방만하게 자본운영을 시도하다가 파산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표〉GC04100443_03_서산지역 대지주의 농외투자 현황
총독부 권력측은 조선의 지방사회를 지배하기 위하여 조선인 유력자들을 각종의 공직기구 내로 포섭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군 단위의 ‘관료-유지 지배체제’가 형성되었다. 예를 들면 서산 지역의 대표 유지인 ‘환동 이씨 가문[위 표의 이기석, 이기승, 이성진]’은 재산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방법으로서 관직이나 공직[당국신용] 획득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자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환동 이씨의 장남인 이기석은 구한말 중추원의관[정3품]과 서산, 음성, 태인, 고창 군수를, 셋째 아들인 이기상은 서산군수와 해미군수를 역임하는 등 활발한 관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환동 이씨와 함께 한창동(韓昌東), 김동익(金東益), 김영복(金永福), 조병순(趙秉純) 등도 공직 진출이나 자선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성연 한씨의 한창동[부석면 취평리, 부친 중추원 참의 역임]은 1924년 도평의회원으로서 군농회 특별의원, 삼림조합 평의원, 서산금융조합 조합장을 역임했으며, 김동익은 고북면 면장과 면협의원, 농회평의원, 학교평의원을, 그리고 김영복은 부석면 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조병순은 근흥면 면협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공직 진출’은 대지주들의 전유물만도 아니었다. 상당수의 중소지주들도 공직 진출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한제동(韓濟東)은 246,943㎡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축산동업조합·삼림조합·농회 등의 평의원을 지냈고 이기팔(李基八)은 정미소 및 삼환회사를 경영하면서 300석을 추수하던 자작지주로서 면장과 농회평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도 중소지주로 보이는 최용순(崔容淳)은 지곡면 면협의원, 학교평의원, 농회특별위원을 지냈고, 한학동(韓學東)은 면장, 학교평의원, 가병준(賈秉峻)은 남면면장, 농회통상의원, 이형렬(李亨烈)은 면장, 농회통사의원, 조동원(趙東元)은 고북면 면장, 해미금융조합장, 박형래(朴炯來)는 면협의원, 학무위원, 안재호(安載瑚)는 면장, 농회 통상위원, 안길리 강습소 운영, 이봉화(李鳳和)는 개항기 법관양성소 졸업, 주사, 군사 역임, 일본적십자사 공주지부 협찬위원, 권병하(權丙夏)는 일본유학, 도평의원, 진흥회연합회장, 강습소소장, 농회특별위원, 김우규(金雨奎)는 면협의원, 농회평의원, 삼림조합평의원, 명규선(明珪善)은 면장, 조부 참판을 역임 하는 등 여러 가지 공직을 겸임했다.
[지방유지]
서산군 태안면에 세거했던 환동 이씨 이희열(李喜烈)은 나이 30세에 답 3두락[3마지기]을 가지고 분가하여 농업과 염업 및 수산에 힘써 도내 굴지의 자산가가 될 수 있었다. 부를 축적한 이후 이희열은 막내아들 이기승으로 하여금 ‘소작인저축농계(小作人貯蓄農契)’를 설치하게 한 뒤, 질병재해 공동구조 활동 등을 하였으며, 또 자신 혹은 아들의 명의로 구빈손미(救貧損米)와 손조(損租), 각종의 구제금과 기부금을 내는 등 많은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이희열 송덕비각(頌德碑閣)의 낙성식과 관련한 신문보도에서는 1918년 1월 88세의 나이로 이희열이 사망할 때 ‘조야명사 집불자(朝野名士 執紼者)’가 무려 5천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송덕비는 김병선(金炳善), 유기현(柳基炫) 등 몇몇 유지인사들의 발기로 세워졌는데, 비용은 면별 모금으로 충당되었다. 『서산군지』[1927]에 따르면 당시 이희열의 자수성가 과정은 수신교과서(修身敎科書)에 실려 경향 각 학교 생도들에게 교수되었다고 한다.
박동진(朴東璡)은 1848년(헌종 14)에 태어나 평생을 서산 안면도에서 살다가 1916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개항기 때 안흥첨절제사, 봉세관 등을 거치면서 거만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빈민구휼활동을 전개한 공로로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박동진의 후광 아래서 아들 박준용은 활발한 유지정치를 펼쳤다. 그 결과 박준용은 서산군농회의 특별위원과 축산동업조합 발기인을 역임할 수 있었다. 승언리 박씨 가운데 유지급 인물로 활동한 인물은 박준용 이외에 박준양, 박준옥, 박준하, 박형래(朴炯來) 등이 확인된다.
김규항(金圭恒)[1871-?] 역시 많은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작인(作人)이 사망하지 않는 한 소작권을 이동하지 않았으며, 흉년이 들어 1두락에 5두 미만의 수확인 나왔을 때는 소작료를 전혀 받지 않는 등 소작인 보호에 힘썼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주민들은 그의 거주지인 서산군 태안면 남문리에 송덕비를 세웠다. 『조선신사보감』에 따르면 김규항은 조부 돈령도정 김진근(金鎭根) 대에 가산의 기초를 마련한 후 부친 중추원의관 김동희(金東熙)[화양학교 설립 시 기부금 제공]에 이르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한편 지주 창립일이 1902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가 토지를 상속받은 시기로 보인다. 김규항은 구한말 통신사(通信司) 전화과 주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무원을 역임하였으며, 한때는 경성상업회가 주관한 일본 시찰단의 일원으로 동경의 산업시설을 시찰하기도 했다. 1926년 서산군 삼림조합 평의원, 태안금융조합의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기동(朴基仝)[1871-?]은 현감을 지냈으며 동학농민운동 때에 배고픈 백성을 구휼하였다. 박기동은 1901년(광무 5)부터 1926년까지 고북면 남정리 금도 박씨 집성촌에 거주하면서 매년 근동의 빈민들을 구제하는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공익사업에도 많은 기부금을 납부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유림 윤상대(尹相大), 서승태(徐承台) 등이 서산군에 포상을 요청하고 송덕비를 세웠다. 박기동은 고북면 면협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군지에는 고서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장자인 박상진은 고북향교의 장의(掌議)를 역임하는 등 ‘근칙사(勤勅士)’로 칭송되었다.
김동익(金東益)은 1896년(고종 22) 고북면 가구리 김씨 집성촌 태생으로 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토지조사국 서기를 역임하다가 귀향하여 고북면 면협의원, 농회평의원, 학교평의원을 지냈다. 김동익은 이재활동을 그의 동생인 김동진(金東璡)에게 일임하였다. 김동익은 1919년 기근이 심할 때 만주 좁쌀을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주재소 개축, 교량이나 도로의 수선, 공동우물 설치 등 공익사업에 많은 기부금을 납부하였다. 김동익과 김동진은 1926년에 면협의원을 역임하였다.
서산 지역의 유지집단은 학무위원이나 학교평의회의 역원을 담당하거나, 후원회·기성회 등에 참여하여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니면 아예 직접 사립학교나 강습소·야학 등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하는 경우도 많았다. 1929년 3월에 설립된 고북면 신정리의 문화강습소는 지역유지인 문병목(文秉穆)이 후원하였다. 또한 『서산군지』를 통해 사회개량기관으로 공인된 서령청년회도 1925년 12월 읍내 유지 박원도(朴元瓙) 등의 도움으로 26명의 아동을 교육하였으며, 1928년 4월, 5월에 설립된 음암면 율목리와 도당리 야학도 김영찬(金榮燦), 윤주영(尹周榮), 김동희(金東喜) 등 유지들에 의해 발기·운영되었다. 사회봉사와 자선활동은 일제하의 지방정치나 유지정치 과정, 더 나아가서는 ‘관료- 유지 지배체제’의 작동메카니즘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정치사회 활동이었다. 특히 교육관련 자선·봉사활동은 사회인망은 물론이고 당국신용을 증진시키는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였다.
[사회운동]
서산 지역에는 일제에 강력히 저항했던 세력도 상당 수 존재하였는데, 3·1 운동 시기 서산 지역에서만 12건의 만세 시위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서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위는 1919년 4월 4일 정미면 소재지인 천의에서 발생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고 감금되었다. 당시 서산 지역의 만세 시위는 서산 주민들, 특히 천도교도나 기독교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 시기, 서산 지역에서도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소작 쟁의와 야학 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청년회가 면 단위로 결성되는 등 활기를 띄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팔봉, 운산, 원북, 서산, 태안, 부석, 해미 등지에서는 지역 유지나 사회단체들이 운영하는 사설 강습소나 야학 등이 운영되었다.
1929년 서산에는 소원청년회, 태안조기회, 몽호청년회, 서산노동조합, 형평사 서산지부, 칼톱청년회, 신간회 서산지회, 미호청년회, 서산군 청년동맹 등이 조직되어 있었다. 이외에 『동아일보』 등 조선어 신문사 지방 지국, 그리고 천도교 청년단이나 기독교 관련 단체들도 서산의 시민 사회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산 지역의 시민 사회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1930년대 이후까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전개 된 서산 지역의 청년 운동은 ‘해방’ 공간에서 전개된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해방 직후 서산 지역에서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일제하에서 혁신 청년 운동이나 비밀 결사 운동을 주도한 인물, 혹은 그 영향력 하에 있었던 청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