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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관아 공격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40
한자 瑞山官衙攻擊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0월 1일[음력]연표보기 - 관아 공격
발단 시기/일시 1894년 9월 14일연표보기 - 동학 두령 30여 명 체포·투옥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1일연표보기 - 동학 두령 구출, 태안 군수와 별유사 공개 참수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1일 - 서산관아 습격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2일연표보기 - 해미읍성 점거
발생|시작 장소 서산관아[지금의 서산시청] - 충청남도 서산시 관아문 1길[읍내동 492]지도보기
성격 관아 습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장성국|문장로|김군집|최맹춘|조응칠|문재석|문구석|문장준|이광우|문장권|문준보|문성렬|강인성|안인묵|안현묵|김성칠|김공필|강운재|김가열|문장의

[정의]

1894년 10월 1일 동학 교도들이 충청남도 서산의 관아를 습격한 사건.

[역사적 배경]

서산·태안 지역에서 조직적인 농민 봉기가 시작된 것은 1894년 음력 10월 1일[양력 10월 29일]이었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해 9월 14일 태안군수 신백희(申百熙)와 종친부에서 파견된 별유사 김경제(金慶濟)가 동학 두령 30여 명을 투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예포대도소(禮包大都所)에 보고되고, 또 9월 30일 최시형의 ‘기포 훈시문’이 도달하자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즉각적인 기포(起包)를 단행하였다.

[경과]

이북면 포지리의 접주 장성국(張聖國) 등은 1894년 10월 1일 밤 횃불을 들고 접주 문장로(文章魯) 집에 모인 김군집(金君執), 최맹춘(崔孟春), 접사(接司) 조응칠(曺應七), 문재석(文在錫), 문구석(文龜錫), 도집(都集) 문장준(文章峻), 이광우(李廣宇), 문장권(文章權), 문준보(文俊甫), 문성렬(文聖烈), 강인성(姜仁成), 안인묵(安仁黙), 안현묵(安玄黙), 김성칠(金成七), 김공필(金公弼), 강운재(姜雲在), 김가열(金可烈), 문장의(文章儀) 등과 함께 태안 관아에 구금되어 있던 동학 두령을 구출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치봉(李致奉)을 북부대장, 안현묵을 기수대장에 정하고 태안 관아에서 처형 순간에 있던 동학 두령 30여 명을 구출한 뒤, 태안군수 신백희와 종친부에서 파견한 김경제를 체포하여 장터에서 작두로 공개 참수하였다. 같은 날[10월 1일] 서산에서도 관아 습격 투쟁이 전개되었다. 당시 서산 농민군들은 서산군수 박정기(朴鉦基)를 율지촌으로 끌고나와 참수하고 인부(印符)를 압수하였으며, 이방 송봉훈을 타살하였다. 그런 뒤 관아와 관속들의 집들을 방화하고, 이튿날에 해미읍성을 점거하였다.

[결과]

당시 서산군수 박정기는 증직으로 군무참의직(軍務參議職)을, 함께 피살된 이방 송봉훈과 박후동은 증직으로 군부주사직(軍部主事職)을 제수받았으며, 순절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당시 예리(禮吏)였던 서세린(徐世麟)[서병언(徐丙彦)으로 개명]은 궐패(闕牌)를 지고 경성으로 가 서산 지역의 전쟁 실태를 정부에 알리는 공을 세웠다. 박정기의 후임으로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성하영(成夏泳)이 부임하였다. 성하영은 이후 공주의 우금치 전투 등에서 농민 전쟁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충청감사로 승진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산·태안 지역 농민군은 봉기 벽두부터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와 아전을 살해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 지역의 농민 봉기가 19세기에 흔히 있었던 민란과는 성격이 판이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1862년 70개 이상의 군현에서 전개된 농민 봉기 과정에서도 농민들이 군수를 직접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군수를 살해하는 행위는 국가 권력, 즉 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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