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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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山錄瑞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후기 한경춘(韓慶春)·한여현(韓汝賢) 부자가 편찬한 충청남도 서산의 사찬 읍지.
[개설]
『호산록(湖山錄)』은 1619년 서산의 사족[문벌이 높은 집안]인 한경춘·한여현 부자(父子)가 편찬한 사찬 읍지로, 1600년대 이전 서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 사찬 읍지가 흔치 않은 가운데 특히 충청남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찬 읍지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자료이며,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여 당대의 사회상을 재현하는 데 유용하다.
『호산록』은 1582년 서산에 수령으로 부임했던 고경명(高敬命)의 제안에 따라 1619년 재지 사족인 한경춘·한여현 부자가 편찬하였다. 건(乾)·곤(坤)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45항목의 다양한 주제로 1500년대부터 1600년대 초반까지의 서산 지역 사회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 현전하는 16~17세기 사찬 읍지는 주로 경상도 지역에 많이 남아 있고 충청도는 『공산지(公山誌)』, 『홍산현지(鴻山縣誌)』, 『충원지(忠原志)』, 『홍양지(洪陽志)』, 『호산록』 등 5종이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산록』을 제외한 4종은 현전하지 않는다.
『호산록』은 당시 각 지역에서 사족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던 사찬 읍지의 기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향촌민에 대한 교화, 고을의 수령에 대한 경계, 가문 현양, 양란 직후의 사회 질서 안정 등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었다.
[항목의 구성]
『호산록』의 첫머리에는 편찬 의도를 나타낸 ‘호산록서(湖山錄序)’, ‘호산록목록(湖山錄目錄)’, ‘호산록의례고상(湖山錄依例考詳)’이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는 편찬 동기와 과정, 저술 목적 등 개인적인 입장 표명과 함께 저술의 기본 방향, 주요 항목의 설정 이유 및 준례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항목 구성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되 더욱 세분화되고 지역적인 면이 부각되었다. 제1책에 36개의 항목을 두어 서산의 행정, 사회, 경제 등의 지역상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제2책은 서산의 인물을 8개 항목으로 분류해 서술하였다.
각 항목 중 행정·경제·재정과 관계되는 항목은 둔전(屯田), 국가 둔전, 장시(場市), 해포(海浦), 해산(海産), 해호(海戶), 자염(煮鹽) 등이다. 이들 항목에는 각각의 위치와 이곳을 이용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고, 임진왜란 이후의 변화상이 보인다.
사회·인물·예속 관련 항목은 공자 세가(孔子世家), 묘사(廟祀), 민속(民俗), 향풍(鄕風), 향서당(鄕序堂), 유람(遊覽), 고금 토주(古今土主), 우거(寓居), 향소 청근(鄕所淸謹), 하리 청근(下吏淸謹) 등이다. 이 항목은 당대 서산에 거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산에 부임했던 관리들을 비롯해 재지 사족, 하급 관리 및 승려, 신분적으로 하층민에 속했던 이들까지 등장한다.
이와 같이 사회·인물·예속 관계에 비중이 두어진 것은 『호산록』에 재지 사족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중에도 향촌민의 생활과 어려움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당시 어지러운 향풍, 관리들의 부정, 국방의 허술함 등 16세기 서산 지역의 실상을 개탄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져 있다.
[토착 성씨와 인물]
『호산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성씨와 인물 기록은 다양한 계층을 다루고 있지만, 역시 양반 사족의 기록이 많다. 관찬 읍지에서 단편적으로 보이는 성씨 기록과 비교하면 『호산록』에서는 각 성씨별 관련 인물이 등장한다. 어디에서 누구의 자제로 태어나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그 집안 족보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미 없어져버린 성씨를 고증하고 있기도 하다.
서산에서 고려 이래로 토착적 지배력을 가진 대표적인 성씨는 서산 정씨와 서산 유씨였다. 이들은 고려 말 원 지배 하에서 성장하여 지방의 토호적 성격을 지니면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다. 서산 정씨는 정인경(鄭仁卿)을 성황신으로 모실 정도로 위세가 있었지만, 『호산록』에 자손들이 등재되지 않을 만큼 쇠락하였다. 서산 유씨는 일부는 향리층으로, 또 일부는 양반 사족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송씨와 문씨는 사족화하여 향촌 활동에 참여하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찬자인 한여현은 고려 조 가장 훌륭한 성씨로 안(安), 정(鄭), 유(柳)를 꼽으면서, 이미 한미해졌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1600년대 초 이미 토착 세력과 이거 사족 간에 세력 교체가 이루어진 듯하다. 『호산록』의 고금 인물 항목에서도 새롭게 입향한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서산 유씨가 9명이고, 청주 한씨가 8명, 그리고 조(趙), 김(金), 안(安), 원(元)씨 등이 3~4명 올라 있고, 강(姜), 정(鄭), 최(崔), 황(黃) 씨도 2명씩, 곽(郭), 문(文), 박(朴), 송(宋), 신(申), 임(任)씨가 1명씩 올라 있다.
[서산향교의 이건 과정]
임진왜란 무렵 조선의 지방 사회에서는 향리층과 양반층 간의 갈등이 여러 형태로 표출되었다. 서산에서는 1573년 명종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封)의 난간이 파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가 시설이 해를 입으면 그것을 관리하는 고을 수령이 파직되었는데 이를 노린 자들이 빈번히 사고를 일으켰던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사건은 수령권에 도전한 백성의 짓이라 판단하여 오히려 수령을 옹호하였다. 태봉 파괴 사건 시 서산군수는 최여림(崔汝霖)이었고, 최여림은 파직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족의 향촌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리하여 최여림의 지원과 협조를 기반으로 서산향교가 이건되기에 이르렀다.
『호산록』 향교조에 의하면 향교 이건은 한영희(韓永禧)의 주도로 서산 사림들이 수차에 걸친 이건 요청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호윤(金好尹), 김호열(金好說), 박영언(朴英彦), 이유인(李惟仁), 유창수(柳昌壽), 문성해(文成海), 이첨수(李忝壽) 등이 협력하였는데 이들은 대표적인 이거 사족인 청주 한씨를 비롯해 경주 김씨, 전주 이씨, 그리고 토성인 서산 유씨와 지곡 문씨였다.
[읍지로 본 바닷가 주민들의 생활상]
서산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갯벌이 펼쳐진 전형적인 해변 고을이었다. 한여현은 이런 지리적 특성을 감안하여 『호산록』에 해포(海浦), 해호(海戶), 해산(海産), 자염(煮鹽) 등의 항목을 설정하였다. 여기에 어살을 통한 고기잡이, 갯벌의 해산물 채취, 서산 등지에서 산출되는 어종, 염한(鹽漢)의 생활 등이 기록되어 있어 해변 고을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당시 서산에서 채취되는 해산물은 관에 납부해야 하는 것 말고도 관리가 가져가는 뇌물용이 많아 백성들은 매우 힘들게 살아야 했다. 어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해물 채취에 나섰는데, 농번기와 겨울에 특히 고생이 심하였다. 가난한 백성이 얇은 홑옷을 입고 맨발로 언 갯벌에 들어가 낙지와 석화를 잡고, 그래도 뇌물용 해산물이 부족하면 자사들이 장무관(掌務官)과 관원에 고해 억울하고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군대를 조련할 때 주민들에게 억지로 소금을 받아내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마을 색장(色掌)을 비롯한 땅을 가진 지주들은 관리의 수족이 되어 앞장서서 침탈을 도와주는 형편이어서 고충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독 대산(大山)과 지곡(智谷) 주민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 지역이 사냥터로 유명하여, 관리와 품관(品官)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식사를 제공받고 마태(馬太)·마죽, 어물과 소금을 마구 거두어 갔다.
소금을 구워 생계를 이어가는 염한(鹽漢)들도 불합리한 세금 징수에 힘겨워했다. 소금 제조 방법에는 염전을 갈아 만드는 경염(耕鹽)과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정염(井鹽)이 있다. 경염에 비해 정염이 수확량 변동이 적어 국가는 정염으로 세금을 거두고자 했으나, 염한들은 염세의 부담이 적은 경염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문제와 함께 각처 아문에서 군대의 식량을 위해 염분(鹽盆)을 설치한 호주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염분이 반가량 황폐화된 상태에서 거의 10배에 달하는 염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읍지로 본 목장 주민들의 생활상]
조선 초 서산에는 대산곶(大山串)과 안면곶(安眠串)에 목장이 있었다. 목장은 주변에 살고 있던 민간인들과 목장 안에서 말을 사육하는 목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목장에서 국가의 말을 사육하는 국역에 종사하던 이들을 ‘목자(牧子)’라 하였는데, 『호산록』에서는 목자를 ‘목군(牧軍)’이라 칭하였다.
목자는 목장마 사육에 필요한 사료를 준비하고 목마군(牧馬軍)에 편성되며, 지방의 특산물인 우육, 마육, 우마피 등을 토산물로 바쳐야 했다. 또 감목관, 감사, 사복시, 점마별감 등 관원의 순행에 따른 수탈도 이어져 도망하는 일이 흔할 정도였다. 목자들의 고역은 목장마를 부정으로 매각하거나, 사축(私畜)을 해서 매매하고 또 마필을 도살, 유실하였다고 거짓 보고하여 사복을 채우는 일이 많아 사회적 물의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또한 전란의 피해로 그 정도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호산록』에 나타나는 목군에 관한 기록은 다른 지방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에 관해서는 별도의 항목이 설정된 것은 아니고, 산천조의 ‘대산(大山)’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