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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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成氏 |
영어공식명칭 | Changnyeong S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식 |
본관 | 창녕 - 경상남도 창녕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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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지방리 |
성씨 시조 | 성인보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 창녕을 본관으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시조 성인보는 고려 중기 중윤호장(中尹戶長)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은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으며, 자손들이 계속 창녕에 세거하여 창녕(昌寧)을 관향으로 삼았다.
[연원]
창녕 성씨의 관향인 창녕은 창성(創姓)하기 이전부터 누대에 걸쳐 세거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 성인보는 고려 고종 때 중윤호장(中尹戶長)을 지냈는데, 정월 초에 송경(松京)의 하례 모임 참석 중 병사하였다고 한다. 아들 성송국이 시신을 업고 창녕으로 돌아오다가,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대지면(大地面) 모산리(牟山里) 맥산(麥山)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성송국은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으며, 자손들이 계속 창녕에 세거하여 창녕 성씨가 되었다. 창녕 성씨는 성송국의 아들 성공필(成公弼)과 성한필(成漢弼)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졌으며, 대략 6세에서 13파로 분파하였다.
[입향 경위]
성주 지역의 창녕 성씨는 성인보의 19세손 성기인(成起寅)의 아들들인 성섭(成涉)과 성숙(成淑)의 자손이 1730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황]
영의정을 역임하고 궤장(几杖)이 하사된 성석린(成石璘)의 11세손 통정대부 증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贈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성세경(成世卿)이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지방리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3백여 년 세거하고 있다. 한편 예문관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의 증손 한성판윤 성담로(成聃老)는 경기도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증손 대에 고령과 성주로 이거하였고, 그 후손의 일부가 월항면 장산리의 철산에 세거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에 194명의 창녕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2리 보남 마을 뒤편 산기슭에 위치한 학고재(學古齋)는 1902년 대한제국 때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主事)를 지낸 성한영(成翰永)이 만년에 자신의 수양처로 삼기 위해 1933년에 지은 건물로 지금은 후손들이 그의 추모 재사로 이용하고 있다. 창성당(昌成堂)은 초전면 월곡1리 배나무골 마을 뒤에 독립운동가인 성대식(成大湜)의 생가 터에 서향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숙종 때에 자인현감을 지낸 성기인(成起寅)의 학덕을 추모하여 1972년 후손들이 건립한 재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