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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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原白氏 |
영어공식명칭 | Suwon Bae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식 |
본관 | 수원 - 경기도 수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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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
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용각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1리 안탕실마을 |
성씨 시조 | 백우경 |
입향 시조 | 백홍규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백우경(白宇經)을 시조,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세거 성씨.
[개설]
수원 백씨(水原白氏)의 시조 백우경은 중국 당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를 지내고 780년(선덕왕 1)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 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 보급에 진력하였다. 중시조(中始祖) 백창직(白昌稷)의 증손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져 수원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연원]
수원 백씨는 중시조인 백창직의 후대에서 대략 29개 파로 분파하여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성주에 세거하는 수원 백씨는 중시조인 백창직의 19세손인 백응상(白應祥)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가 함흥판관을 지내 함판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한편 13세손 백효연(白效淵)은 산음현감을 지내 산음공파의 파조가 되었는데, 그의 현손 백홍규(白弘圭)가 칠곡 약목에서 1630년에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로 입향하였고, 22세손 백수기(白守起)는 1780년 월항면 용각리로 이거하였다.
[입향 경위]
백홍민은 조선 인조 때 통정대부 함안군수에 증직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그의 아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백응상이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된 뒤 선친의 혼령을 위로하려는 효심으로 1599년에 경기도 포천군 서면 수곡리(樹谷里)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興山)으로 입향, 그 후손들이 흥산리와 용각리 및 금릉군 증산(甑山)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 백창직의 16세손 백치원(致援)은 선조 때의 당쟁을 피해 1604년 선남면 용신리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용신리와 도성리, 초전면 용성리에 세거하고 있다.
[현황]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금산1리는 수원 백씨 집성촌으로 선조 때 상주목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사한 백추(白鶖)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대가면 흥산1리 안탕실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백응상이 1599년 이곳으로 이주해 형성한 마을로 이후 수원 백씨들이 세거하며 집성촌이 되었으며, 백도선(白道先)이 임진왜란 때인 1595년에 달성군 논공에서 금수면 명천리로 입향하여 후손들이 세거하다가 대부분 대구로 이주하였다. 백홍규의 후손들은 성주읍 금산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백치원의 후손들이 선남면 용신리와 도성리, 초전면 용성리에 세거하고 있다. 용신2리 용대골은 1590년 백치원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용대(龍大)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하며 마을에는 백치원의 후손인 수원 백씨들이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2015년 현재 성주군에 615명의 수원 백씨가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리에 백인웅(白仁雄)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경천재(景川齋)와 >수원 백씨의 종당(宗堂)인 회천서당(晦川書堂)이 있다. 성주읍 금산1리에는 백추의 후손들이 그를 위해 1919년 건립한 경신재(景愼齋)가 마을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위치한 운고재(雲皐齋)는 유학자인 백학수(白鶴洙)의 학덕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967년에 지은 재사이다. 신암백추신도비(愼菴白鶖神道碑)는 연산 마을 옛 진입도로 변에 세워져 있다. 백성흠사적비(白聖欽事蹟碑)는 대가면 흥산리 도로변 양쪽으로 형성된 마을인 바깥탕실 마을 남쪽 끝 도로변에 있다. 2006년 9월에 세운 비석의 전면에 ‘애국지사우초수원백공사적비(愛國志士友蕉水原白公事蹟碑)’라 새겨져 있다.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관리번호: 30-1-52]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