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83
한자 白年雪
영어공식명칭 Baek Nyeonseol
이칭/별칭 이갑룡(李甲龍),이창민(李昌珉)[혹은 李昌民],이향노(李鄕奴)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경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 5월 19일연표보기 - 백년설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2년 - 백년설 성주공립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백년설 성주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9년 - 백년설 성주농업보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1년 - 백년설 성주농업보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1년 - 백년설 한양부기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3년 - 백년설 한양부기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백년설 일본인 교사에 대한 항명 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
활동 시기/일시 1933년 - 백년설 은행원으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백년설 신문사 견습 기자로 활동하면서 희곡 「딱한 사람들」 저술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백년설 콜롬비아 문예부에서 작사 생활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백년설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감, 「유랑 극단」 취입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백년설 가수 데뷔 「유랑 극단」 출반, 「두견화 사랑」, 「고향의 지평선」, 「북방여로」, 「일자일루」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백년설 「나그네 설움」 출반, 혜산진 공연 연기 문제와 관련하여 경기도 경찰국 고등과에서 고문을 당하며 밤샘 조사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백년설 「만포선 길손」,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등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백년설 오케레코드사로 이적,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누님의 사랑」 등 히트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백년설 「일쌍급제」, 「정든 땅」 출반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백년설 화청악극단, 백년설 가요대, 청엽예능대를 조직하여 순회공연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백년설 봉화가극단 조직, 대구 키네마 극장에서 공연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백년설 서울 상경, 서울KPK악극단 특별 출연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백년설 대구 배나무 샘골에서 고아원 청동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백년설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마음의 고향」, 「삼각산 손님」, 「해인사 나그네」 등 출반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백년설 삼남 일대 순회공연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백년설 대한레코작가협회 감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백년설 백민영화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백년설 영화 「삼여성」 국도 극장에서 상영
활동 시기/일시 1963년 7월 10일~7월 17일 - 백년설 은퇴 공연
몰년 시기/일시 1980년 12월 6일연표보기 - 백년설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연표보기 - 백년설 문화 훈장 보관장 추서
출생지 백년설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3길 89[예산리 414]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백년설 이주지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백년설 이주지 - 미국 로스앤젤레스
성격 가수|영화제작자|사업가
성별
본관 성주
대표 경력 경북사회산업연합회 회장|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위원장|한국연예단장협 초대 회장|경향신문사 일본 동경지사장

[정의]

한국 근대 가요의 선구자 역할을 한 성주 출신의 가수, 영화 제작자, 사업가.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이며, 1964년 이창민(李昌民)으로 개명하였다. 백년설은 예명이며, 작사가명으로 향노(鄕奴), 이향노(李鄕奴) 등을 사용하였다. 부인은 심연옥이다.

[활동 사항]

백년설(白年雪)[1915~1980]은 1915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고, 1929년 현 성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성주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1933년 서울에서 한양부기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어 신문사 견습사로 들어가 2년 동안 문학, 연극 수업을 목표로 수편의 시와 각본을 썼고, 1935년 성악가 안기영의 소개로 콜롬비아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작사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문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했다가, 고베[神戶]에서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던 박영호(朴英鎬)의 권유로 전기현(全基玹) 작곡의 「유랑극단」을 취입하였다.

1939년 백년설이라는 예명으로 가수에 데뷔하여 「두견화 사랑」, 「고향의 지평선」, 「북방여로」, 「일자일루」 등이 히트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백년설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민족을 생각하여 흰색을 좋아하고 민족의 영봉인 백두산의 서설(瑞雪)과 같이 백의민족의 기성(氣性)을 가지고 살고 싶다는 포부와 꿈을 담고자 예명으로 정한 것이었다.

1940년에는 혜산진 공연의 연기 문제와 관련하여 경기도 경찰국 고등과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밤샘 조사를 받았다. 경찰이 혜산진 공연의 일정이 지연된 것을 보천주재소 습격 사건과 관련지었지만, 사실은 일제가 당시의 이들 노래가 일제에 반항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여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2년에 이적했던 오케레코드사가 1944년에 폐쇄되자, 화청악극단, 백년설가요대, 청엽예능대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다녔다.

1945년에는 광복과 동시에 연극에 손을 대며 봉화가극단을 조직하고, 9월 1일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광복 후 최초의 연극 공연인 「깃발 날리는 날」을 공연하였다. 1950년에는 대구 변두리 배나무 샘골에 청동원을 설립하였다. 1953년 서라벌레코드사를 설립하여 「마음의 고향」, 「삼각산 손님」, 「해인사 나그네」 등을 출반하면서 가수와 작사가 활동을 이어갔고, 경북사회산업연합회 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56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와 평화신문사 사업국장으로 활동했고, 1958년에는 센츄리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백민영화사를 창설하였다. 1960년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 1961년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위원장, 1963년 한국연예단장협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63년에는 시민 회관에서 은퇴 공연도 하였다. 1964년 경향신문사 일본 동경 지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78년 8월 부인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1980년 12월 6일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34년 「딱한 사람들」, 1939년 「두견화 사랑」·「고향의 지평선」·「북방 여로」·「일자일루」, 1940년 「번지 없는 주막」·「산팔자 물팔자」·「나그네 설움」, 1941년 「만포선 길손」·「복지만리」·「대지의 항구」, 1942년 「고향설」·「아주까리 수첩」·「누님의 사랑」, 1943년 「일쌍급제」·「정든 땅」, 1953년 「마음의 고향」·「삼각산 손님」·「해인사 나그네」 등의 작품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02년 문화 훈장 보관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