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45 |
---|---|
한자 | 崔轔 |
영어공식명칭 | Choe Rin |
이칭/별칭 | 사발(士發),매와(梅窩),치광자(癡狂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597년 - 최린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최린 아버지 최항경을 따라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633년 - 최린 사마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 - 최린 「퇴계이선생변무소」를 지어 퇴계 이황 변호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 - 최린 병자호란 때 아버지 최항경의 명으로 형인 최은과 함께 고령의 의병소로 달려갔으나, 문경에서 강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며 귀향 |
몰년 시기/일시 | 1644년 - 최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2년 - 최린 오암서원에 배향 |
출생지 | 최린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산56-2 |
거주|이주지 | 최린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
수학|강학지 | 최린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 |
묘소|단소 | 최린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 2리 |
사당|배향지 | 오암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천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발(士發), 호는 매와(梅窩)·치광자(癡狂子).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최사철(崔師哲)이고,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최정(崔淨)[1528~?]이다. 아버지는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1560~1638]이며, 어머니는 참봉(參奉) 류경준(柳景濬)의 딸 풍산 류씨(豐山柳氏)이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승의부위(承義副尉) 이시익(李時益)[1567~1642]의 딸이다. 관봉(鸛峰) 최은(崔𨏈))이 그의 형이다.
[활동 사항]
최린(崔轔)[1597~1644]은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인해 집안이 가야산성(伽倻山城)[일명 백운산성(白雲山城)]으로 피난 갔을 때에 태어났다. 8세 때 형인 최은과 함께 아버지 최항경을 따라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훗날 스승 정구가 세상을 떠나자, 몸소 염빈(殮殯)[시신을 염습한 뒤 관에 넣어 안치함]을 행할 정도로 사제(師弟) 간의 정의(情誼)가 두터웠다. 이후 1633년(인조 11) 형 최은과 사마시에 동방급제(同榜及第)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마에 열중하였다.
1635년(인조 13) 무고를 당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변호하기 위해 변무소(辨誣疏)를 지었는데, 말뜻이 분명하여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칭찬하였다.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아버지 최항경의 명으로 형 최은과 함께 고령의 의병소(義兵所)로 달려갔으나, 문경(聞慶)에서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이후로 치광자(痴狂子)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면서 종신토록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1638년(인조 16)에 아버지 최항경이 세상을 떠나자, 예에 의거하여 정성껏 장례를 치렀으며, 삼년상이 끝난 후에는 작천(柞川)에다 집을 짓고 정원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피는 매화의 지조에 감탄하여 ‘매와(梅窩)’라 편액하고 이를 자호로 삼았다.
[학문과 저술]
최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을 일찍 성취했으나, 8세 때 한강 정구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게 되어, 속유(俗儒)들의 사장학(詞章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스승 정구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는데, 정구가 예서(禮書)를 편집할 때마다 최항경에게 편지를 보내어 “반드시 두 아들과 함께 살펴보라.”라 했던 데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정구 사후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장현광으로부터 사물(四勿)의 뜻을 들은 뒤에 물자설(勿字說)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가례의절집해(家禮疑節集解)』와 『대학인의(大學引義)』를 들 수 있고, 문집으로 『매와선생문집(梅窩先生文集)』 4권 2책이 남아 있다.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를 수집하여 쓴 『춘정편략(春正編略)』이라는 저술도 남겼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 2리에 있다. 아버지 최항경과 형 최은의 묘소도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1782년(정조 6)에 아버지 최항경 및 형 최은과 함께 오암서원(鰲巖書院)[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에 배향되었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행장(行狀)을 쓰고, 종8세손인 최영준(崔永駿)이 행록(行錄)을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