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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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魯 |
영어공식명칭 | Jeong Ro |
이칭/별칭 | 공면(公勉),창파(蒼坡),충경(忠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751년 - 정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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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1년 - 정로 장남인 정시를 따라 가산으로 이동 |
몰년 시기/일시 | 1811년 - 정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2년 - 정로 사헌부 집의로 추증, 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가증, 가산의 충렬사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59년 - 정로 이조판서로 가증, 충경으로 증시 |
출생지 | 정로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거주|이주지 | 정로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거주|이주지 | 정로 이주지 -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
수학|강학지 | 정로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
묘소|단소 | 정로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
사당|배향지 | 충렬사 -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경력 | 증 이조판서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면(公勉), 호는 창파(蒼坡).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7세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정창재(鄭昌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정복흠(鄭復欽)이며, 할아버지는 정달제(鄭達濟)이다. 아버지는 정동섭(鄭東燮), 친어머니는 박봉징(朴鳳徵)의 딸 순천 박씨(順天朴氏), 의붓어머니는 김여창(金汝昶)의 딸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다. 부인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통덕랑(通德郞) 박사우(朴思禹)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로(鄭魯)[1751~1811]는 1751년(영조 27)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의리와 절개를 특히 중시하였던 그는, 일찍이 진주 남강을 유람하면서 의기(義妓) 논개(論介)[?~1593]의 비에 절을 한 뒤, “나는 논개의 의리에 절을 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1811년(순조 11) 9월에는 장남인 정시(鄭蓍)[1768~1811]를 따라 가산(嘉山)[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에 가서 생활하였는데, 당시 가산에 큰 흉년이 들자 정시에게 녹봉을 털어 백성을 구제하라는 가르침을 내렸다.
홍경래(洪景來)[1771~1812] 등이 반란의 조짐을 보였을 때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수령의 직책임을 아들 정시에게 강조하였다. 얼마 뒤 홍경래가 반란군을 이끌고 관아로 대거 침입하였는데, 자리를 피하라는 아들 정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가르쳤는데, 어찌 나 혼자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후 반란군이 정시를 끌고 나와 항복하라고 위협하자, 구차히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큰소리로 이야기하였다. 이에 정시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면서 순절했고, 정로 역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적들을 꾸짖다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학문과 저술]
정로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여 얽매이는 바가 없었는데, 산방(山房)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면서 어른스러운 풍도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효도와 우애가 뛰어나 부모상을 정성껏 치렀으며, 의붓어머니를 사랑과 공경으로 모시어 사람들이 모두 친어머니라 생각할 정도였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정대한 영웅이지만 도리어 전전긍긍한다.[正大英雄戰兢做來]”라는 글을 걸어 두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사초구차(辭貂裘箚)』에서 흥기한 바가 컸다. 과거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자 50세에 그만두었고, 이후로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역사서와 법첩(法帖)[옛 서가(書家)의 법서(法書)를 나무나 돌에 새긴 뒤 탁본하여 만든 서첩]을 연구하면서 부귀영화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 있으며, 묘소 아래에 아들 정시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홍경래의 난이 평정된 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1812년(순조 12) 6월에는 영의정(領議政) 김재찬(金載瓚)[1746~1827]의 건의로 이조참판(吏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더해졌는데, 이때 가산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1859년(철종 10)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관직이 더해지고 충경(忠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1759~1838]가 묘표(墓表)를 찬했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으며,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묘지명(墓誌銘)을 작성하였다. 1930년에는 후손인 정두용(鄭斗容)·정오영(鄭五永) 등이 『가산순절록(嘉山殉節錄)』 7권 3책을 간행하여 정로와 정시의 순절 사실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