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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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矩 |
영어공식명칭 | Jeong Gu |
이칭/별칭 | 중상(仲常),설학재(雪壑齋),정절(靖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명환 |
[정의]
동래 정씨 성주 입향조 정선경의 아버지이자 여말선초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증조할아버지는 정유의(鄭惟義)이고, 할아버지는 정호(鄭瑚)이며, 아버지는 정양생(鄭良生)[?~1392]이다.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안축(安軸)[1282~1348]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참의 이인(李嶙)의 딸 고성 이씨이며, 둘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좌윤 윤승경(尹承慶)의 딸이다. 아들 정선경(鄭善卿)[1395~1442]은 동래 정씨(東萊鄭氏) 성주[현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노리] 입향조이다.
[활동 사항]
정구(鄭矩)[1350~1418]는 1377년(우왕 3)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조에서 전교 부령(典校副令)을 역임하였는데, 1382년(고려 우왕 8)에 김극공이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훗날의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투서의 작성자로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귀양을 갔다. 1392년(태조 원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으며, 1397년(태조 6)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1400년(정종 2) 4월에는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9월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12월에 ‘사헌부가 분경(奔競)[벼슬을 얻기 위해 권문세가의 집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일]을 금하지 않는다’는 낭사(郞舍) 서유(徐愈)[1356~1411]의 상소로 인해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에는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1407년(태종 7) 4월에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제수되었다. 그해 6월에는 세자와 황녀의 혼인을 사사로이 의논한 일에 연루되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조박(趙璞)[1356~1408] 등과 함께 순금옥(巡禁獄)에 갇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으며, 며칠 뒤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408년(태종 8) 2월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3월에 국가에서 토지를 재측량하여 나누어 준 일이 있었는데, 호조의 관리 몇 명이 물의를 일으키자, 일찍이 호조판서를 지낸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구종지(具宗之)[?~1417 ]·정경(鄭耕)[1370~1421]·민심언(閔審言)[?~?]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듬해에도 강음현(江陰縣)의 토지 분배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으로 인해 성석린(成石璘)[1338~1423]·이계공(李季拱) 등과 함께 구금되었으나,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니었기에 며칠 만에 방면되었다.
1412년(태종 12)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 1414년(태종 14)에는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1416년(태종 16)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었으며, 1417년(태종 17) 1월에는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윤5월에 복명(復命)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에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으로 부임하였으나, 8월에 풍질(風疾)로 사직하였다. 이후 이듬해인 1418년(태종 18) 5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정구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은거하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정구는 조선 왕조로부터 거듭 관직이 제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송산(松山)에 은거한 채 송산(松山) 조견(趙狷)[1351~1425], 양촌(陽村) 원선(元宣)[?~?] 등과 함께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정구는 어려서부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등과 함께 성리서(性理書)를 연구하며 도의(道義)의 사귐을 이루었다.
[묘소]
묘소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에 있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997년에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산13-13으로 이장하였으며, 현재 의정부시 향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평소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1409년(태종 9)에 건원릉(健元陵)[태조의 무덤] 신도비(神道碑)의 전액(篆額)을 담당하였는데, 그 공으로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1744년(영조 20)에는 영빈서원(瀯濱書院)에 정종(鄭種)[1417~1476], 정표(鄭彪)[1515~1578] 등 5명과 함께 배향되었고, 1794년(정조 18)에는 반암서원(盤巖書院)에 정종·정선경(鄭善卿)·정비(鄭秠)와 함께 배향되었다. 한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고려유신삼선생전(高麗遺臣三先生傳)」을 지어 원선·조견과 함께 그 절의를 기렸는데, 그것과 유사한 내용이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나려유민전(羅麗遺民傳)」에도 축약되어 들어가 있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