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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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𨥭 |
영어공식명칭 | Jang Yeong |
이칭/별칭 | 명세(鳴世),소매당(訴梅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옥 |
[정의]
조선 후기 성주에 우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 자는 명세(鳴世), 호는 소매당(訴梅堂). 고려조에 시호가 충정인 장안세(張安世)의 12세 후손이며 조선조 이조판서를 지낸 장열(張烈)이 증조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여헌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고 아버지는 장응일(張應一)이다. 장현광이 사촌 동생 장현도의 아들 장응일을 후사로 삼았는데, 장응일은 호가 청천당(聽天堂)으로서 부제학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야로 송씨(冶爐宋氏)로 송희규의 증손녀이자 송광정의 딸이다. 부인은 성산 이씨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의 손녀이자 이도장(李道長)의 딸이다.
[활동 사항]
장영(張𨥭)[1622~1705]은 1622년 경상북도 선산군 인동[현 구미시 인동동]에서 태어났다. 166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71년에 전설사 별감(典設司別監)이 되었다. 현종, 숙종 대 외직으로 나가서는 자여찰방, 경안찰방, 이인찰방을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군자감 판관, 공조정랑, 광흥창 주부, 세자익위사 위수(世子翊衛司衛率)를 역임하였다. 특히 이인찰방으로 있을 때 역전(驛田)이 황폐해져 있음을 보고 조정에 세금을 면해 달라고 진정하였다. 인정(仁政)을 펴고 청렴하였다는 평이 있다. 때때로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임금의 교지를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장영은 “주상을 섬기는 날이 길어지면 어버이 섬기는 날이 짧아진다.”라고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아버지 장응일의 청천와(聽天窩) 앞에 따로 집을 하나 지어 소매당(訴梅堂)이라 이름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였고 삼년상을 극진히 치렀다. 병자호란 때 의병에 나선 백포(栢浦) 채무(蔡楙)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소암사(嘯巖祠)를 창건하고 배향하였다. 1674년(현종 15)에 허목(許穆)이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을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일을 결정할 때 공정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해 허목이 감탄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한조은장행(韓釣隱壯行)」 1편, 「대책문(對策文)」, 「과거에 합격함[占解]」 몇 편의 글, 약간 수의 시가 있고, 후손들이 다른 사람의 문집이나 기타 여러 글들을 참고하여 장영의 업적을 기록한 「6대조고위수부군유사[六代祖考衛率府君遺事]」가 있다. 1935년 후손들에 의해 『소매당유집(訴梅堂遺集)』이 간행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대흥사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손자가 장수한 덕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손자가 장수한 덕으로 사복(司僕)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