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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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鎭 |
영어공식명칭 | I Changjin |
이칭/별칭 | 운장(雲長),창주(滄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희대 |
출생 시기/일시 | 1619년 - 이창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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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84년 - 이창진 사망 |
출생지 | 이창진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
거주|이주지 | 이창진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
거주|이주지 | 이창진 이주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묘소|단소 | 이창진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산80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벽진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운장(雲長), 호는 창주(滄洲). 할아버지는 이등림(李鄧林), 아버지는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1568~1639]이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 권사성(權思性)의 딸이고, 부인은 해평윤씨(海平尹氏) 윤경지(尹敬之)의 딸이다. 아들은 이해발(李海潑)이다.
[활동 사항]
이창진(李昌鎭)[1619~1684]은 1619년 11월 1일 아버지 이언영이 성주의 오도종리(吾道宗里)[오도말, 현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에 거주할 때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인 1633년(인조 11) 아버지에게 함께 『춘추(春秋)』를 배운 일휴정(日休亭) 이영세(李英世)[1618~1698)와 평생을 도의로 교유하였다. 17세에 향교에서 수학하고 19세에 부지암(不知巖)으로 가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1세 때 부친 이언영이 별세하자 3년 동안 예를 다하였다. 25세 때인 1643년(인조 21)부터 희역(羲易)·노론(老論)·주자강목(朱子綱目) 등을 깊이 탐구했고, 자경설(自警說)을 지었다.
32세 때인 1650년(효종 1)에 성균관 유생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자 영남 유생들이 반대 소를 올렸고, 그 중심 인물들은 과거 응시가 정지되는 벌을 받았다. 당시 이창진은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답안을 작성하지 않고 나왔고, 이후로 평생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사양서원(泗陽書院)의 창건에 크게 애썼고, 33세 때 사양서원에서 사상견례(士相見禮)[선비들이 공식적으로 서로 만나 인사하는 유교 의례]를 행하고 주자서(朱子書)를 강론하였다. 37세 때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으로부터 ‘완석정’의 편액과 기문을 받았고, 50세 때 유일(遺逸)로 김천도찰방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8세 때는 정승 목내선(睦來善)이 능력을 안타까워했음에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생 동안 신독(愼獨)과 존양(存養)을 중시하고 학문과 수양에 힘썼으며, 완석정(浣石亭)을 중수하고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주자(朱子)가 창주서원(滄洲書院)을 열고 오도(吾道)를 여기에 붙인다고 한 말을 따서 창주를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중년에 선대의 고향인 칠곡군 석전(石田)[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출생지인 오도종리로 돌아와 안빈낙도를 추구하며 지냈다. 63세 때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으며 평생을 처사로 살았다. 1684년(숙종 10) 8월 14일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 『창주집(滄洲集)』이 있다. 1926년에 후손 이주후(李周厚)가 이능윤(李能允)의 발문을 받아 간행하였다. 우언으로 『방탁모조설(放啄木鳥說)』, 『축냉호문(逐冷虎文)』을 지었다.
[묘소]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 산80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에 재실인 오도재(吾道齋)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