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96
한자 李種杞
영어공식명칭 I Jonggi
이칭/별칭 종도(種燾),기여(器汝),만구(晩求),다원거사(茶園居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강희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7년연표보기 - 이종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8년 - 이종기 성주 회연서당 강회 참석
몰년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 이종기 사망
출생지 이종기 출생지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묘소|단소 이종기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101-1
성격 문인|학자
성별
본관 전의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기여(器汝), 호는 만구(晩求)·다원거사(茶園居士).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재훤(李在翧), 친아버지는 이능용(李能容)이며, 종숙인 이현용(李鉉容)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이명(異名)은 종도(種燾)이다. 외할아버지는 박이탄(朴履坦)이다.

[활동 사항]

이종기(李種杞)[1837~1902]는 1837년(헌종 3) 성주군 다산면 상곡[현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야 말문이 터져 늦게 공부를 시작했으나 7세에 사략(史略)을 혼자 해석할 정도로 성취 속도가 너무 빨라 아버지가 걱정하여 10세까지 공부를 중단시켰다. 12~13세의 나이로 성주 수륜면에 있는 회연서당(檜淵書堂)[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의 강회(講會)에서 질문하고 토론하였는데 원로 학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제자가 되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사사(師事)하였다. 뒤에는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도 수학하였다.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을 통달했고, 항상 사단(四端)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데 힘썼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친밀하게 교유하여 경상남도 거창에 함께 이주하여 살기도 하였다. 당시 학자들이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心卽理)설에 많이 동조했으나,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경향을 경계하여 균형적인 태도를 지녔다. 명망이 높아져 1894년(고종 31)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헌(顧軒) 정래석(鄭來錫),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등과 교유하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원장(院長)으로 두 번의 추천을 받았다.

만년에는 성주군 다산면 상곡에 서락서당(西洛書堂)[현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281-3]을 창건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문인(門人)은 200여 명이었고, 대표적 인물은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 금주(錦洲) 허채(許埰), 성헌(省軒) 이병희(李炳憙), 조용섭(曺龍燮), 김병린(金柄璘), 송홍래(宋鴻來) 등이었다. 1902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설(理氣說)을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고, 이런 입장은 「사칠기발이승지변(四七氣發理乘之辨)」, 「이기선후주종편전설(理氣先後主從偏全說)」 등에 잘 나타난다. 저서로는 원집(原集) 10책, 속집(續集) 4책, 부록(附錄) 2책으로 구성된 『만구집(晩求集)』이 있다.

[묘소]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101-1 절두골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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