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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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約東 |
영어공식명칭 | I Yakdong |
이칭/별칭 | 춘보(春甫),노촌(老村),평정(平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진갑곤 |
[정의]
조선 전기 성주 교수를 지낸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字)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고조할아버지는 정용위 중랑장(精勇衞中郞將) 이환(李桓)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이희목(李希牧)이다. 할아버지는 군기소감(軍器少監) 이존실(李存實)이고, 아버지는 남해현령 이덕손(李德孫)이다. 어머니는 공조전서(工曹典書) 류무(柳務)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약동(李約東)[1416~1493]은 성주목 신곡면[현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김숙자(金叔滋)의 문인으로, 1451년(문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을 거쳐 1453년(단종 1) 성주 교수(星州敎授)로 있었다. 1454년(단종 2) 감찰·황간현감 등을 지냈다. 1458년(세조 4)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어 임기 만료 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이후 청도군수, 선전관,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쳤다. 1466년(세조 12) 구성부사(龜城府使)가 되고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데 활약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실수로 들고 나온 채찍을 성루에 걸어 두고 올 만큼 청렴하였다. 또한 항해하다가 파선될 위기에 처해서는 부하들이 몰래 넣어 온 갑옷을 바다에 던짐으로써 하늘의 화를 풀려 하였다는 투갑연(投甲淵)의 일화가 전한다. 1474년(성종 5) 경상좌수사가 되었고, 1477년(성종 8) 대사간에 제수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1478년(성종 9) 경주부윤, 1482년(성종 13) 호조참판, 1486년(성종 17) 전라도관찰사,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1489년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491년(성종 22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만년에 현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에서 지냈다.
[학문과 저술]
후손 이학준(李學峻)과 이교준(李敎峻) 등이 1848년(헌종 14)에 5권 1책으로 간행한 『노천선생실기(老村先生實紀)』가 있다.
[묘소]
묘는 경상도 김산군(金山郡) 남쪽 25리 과외면(果外面)[현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묵방산(墨坊山) 동남쪽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諡號)는 평정(平靖)이다.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어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하로서원(賀老書院)[전 경렴서원(景濂書院)]과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