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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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文楗 |
영어공식명칭 | I Mungeon |
이칭/별칭 | 자발(子發),묵재(默齋),휴수(休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철 |
[정의]
조선 전기 성주로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 아버지는 승문원 정자 이윤탁(李允濯)[1462~1501]이고,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윤탁은 1501년(연산군 7)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작은아버지 이윤식(李允湜)은 1506년(연산군 1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작은형 이충건(李忠楗)과 사촌형 이공장(李公檣)은 1515년(중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카 이휘(李煇)와 이염(李爓)은 1543년(중종 3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김언묵(金彦默)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작은형 이충건과 더불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큰형 이홍건과 같은 해에 20세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리학의 대가 성혼(成渾)[1535~1598]의 아버지이자 당대 유명한 산림인 성수침(成守琛)[1493~1564]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조상(弔喪)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문건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이 일로 인해서 1521년(중종 16) 이충건은 청파역(靑坡驛)으로, 이문건은 낙안(樂安)으로 유배되었다. 1527년(중종 22)이 되어서야 사면되었다.
1528년(중종 23) 3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 박사,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1535년(중종 30) 모친상으로 관직을 떠나 누이의 큰아들인 장조카 이휘와 함께 경기도 노원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탈상 후 1537년(중종 32)에 다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이후 사헌부 장령, 실록청 편수관, 승문원 판교, 빈전도감 낭관,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으며, 인종의 왕비인 인성 왕후(仁聖王后)는 처이모의 딸이다.
명종이 즉위한 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조카 이휘가 화를 입어 사망하였고 그에 연루되어 52세가 된 1545년(명종 즉위년)에 성주로 귀양을 왔다. 이로부터 23년 동안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 유배가 풀리지 않았다. 유배지 성주에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1493~1583],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1494~1558]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학문과 저술]
『묵재일기(默齋日記)』, 『양아록(養兒錄)』을 남겼다. 『묵재일기』는 조선 시대 최초의 본격적인 일기의 거작으로 평가된다.
[묘소]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 산47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송시열(宋時烈)이 행장을 썼다. 송시열에게 이문건은 할머니 고모의 아들이다. 1622년(광해군 14) 퇴계 이황·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1525~1592]과 함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화암서원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괴강로 313[검승리 733-9]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