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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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應褧 |
영어공식명칭 | Bae Eunggyeong |
이칭/별칭 | 회유(晦有),안촌(安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구율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개설]
배응경(裵應褧)[1544~160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도군수로서 의병과 함께 항쟁하였다. 성주에서 태어났으나 만년에는 영주에서 머물렀다.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등과 교유하였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 증조할아버지는 증제용감 정(贈濟用監正) 배윤문(裵潤文)이고, 할아버지는 증형조참의 배유(裵裕)이다. 아버지는 배무원(裵茂元)이며, 어머니는 제릉참봉(齊陵參奉) 정희장(鄭希章)의 딸 서산 정씨(瑞山鄭氏)이다. 부인은 이춘연(李春年)의 딸 합천 이씨(陜川李氏)와 전해(全海)의 딸 옥천 전씨(沃川全氏)이다. 배응곤(裵應滾)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배응경은 경상도 성주목 남산리 안촌[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한 후 1576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정랑(正郞)을 거쳐 1592년 청도군수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000명을 모아 창의하였다. 의병 부대를 ‘야격군(野擊軍)’이라 이름하고 박경전(朴慶傳)을 대장으로 삼아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하는 전공을 올렸다.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1593년 영주로 옮겨 살았다. 1595년(선조 28)에는 순천부사가 되었고 1597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금산을 방어하였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으로 후퇴하는 왜적의 퇴로를 끊어 격멸하려고 하였는데 관찰사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을 당하였다. 우찬성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와 부마인 서경주(徐景霌)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1601년(선조 34) 대구부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곧 사직하고 영주에 머물렀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