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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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楔 |
영어공식명칭 | Bae Seol |
이칭/별칭 | 건부(建夫),중한(仲閑),서강(西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구율 |
출생 시기/일시 | 1551년 - 배설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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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3년 - 배설 별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배설 동래부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배설 경상우수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99년 - 배설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10년 - 배설 신원, 가선대부 병조참판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873년 - 배설 자헌대부 병조판서 증직 |
출생지 | 배설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 |
대표 관직 | 경상우도수군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무신.
[개설]
배설(裵楔)[1551~1610]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웠으나 처형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년) 신원(伸寃)되어 증직되었다. 배설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건부(建夫)·중한(仲閑), 호는 서강(西岡). 아버지는 선무원종 이등 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배덕문(裵德文)이다. 부인은 송원(宋源)의 딸 야로 송씨(冶爐宋氏)이며 아들로 배상룡(裵尙龍), 배상호(裵尙虎)가 있다.
[활동 사항]
배설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군관으로 참전하였다. 조경이 추풍령에서 패했을 때 병력을 수습하여 항전하였다. 합천군수 재임 때 미승산성(美崇山城)을 축조하고 부산첨사로 전임되었다.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군함과 무기를 수리하였는데, 도원수에게 시국의 폐단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가 밀양부사로 좌천되었다. 밀양부사를 거쳐 선산부사로 있을 때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고 우물과 못을 팠으며 혜창(惠倉)을 설치하였다. 1597년(선조 30) 경상우수사 재임 시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함께 장작 귀선(粧作龜船)[판옥선을 거북 모양으로 꾸며 만난 전함]을 만들어 명량 해전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해 7월 통제사 원균(元均)의 명령으로 웅천을 공격하였는데 급습하는 전략으로 잘 싸웠으나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칠천량 해전 초 전세가 밀리자 전선 12척을 이끌고 남해 방향으로 후퇴한 후 군사 시설과 군량을 불태우고 남은 백성을 피난시켰다. 기록에는 칠천량 해전이 끝나고 복귀한 후 신병 치료 차 전선에서 물러났다가 사라진 후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배설이 남긴 시조가 증손자 배석휘(裵碩徽)가 지은 『가범(家範)』에 전하는데 시조 문학사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명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610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1873년(고종 10)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