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558
한자 金宇顒
영어공식명칭 Gim Uong
이칭/별칭 숙부(肅夫),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0년연표보기 - 김우옹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김우옹 식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김우옹 홍문관 정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김우옹 부교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9년 - 김우옹 부응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김우옹 홍문관 직제학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김우옹 부제학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김우옹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김우옹 승문원 제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김우옹 대사성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김우옹 예조참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김우옹 사직
몰년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김우옹 사망
출생지 김우옹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우옹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회연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청천서당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의성
대표 관직 대사헌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낸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이며, 어머니는 곽인화(郭人和)의 딸 청주 곽씨(淸州郭氏)이다. 24세 때 조식(曺植)[1501~1572]의 외손녀와 혼인하였다. 이계(伊溪) 김우홍(金宇弘)[1522~1590]과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1524~1590]이 형이다.

[활동 사항]

김우옹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조식의 제자였던 오건(吳健)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선조 6) 홍문관 정자가 되었고, 이어 수찬으로 재직 시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서 이조 좌랑과 사인 등을 지냈다. 1579년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단에 대해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여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당상관에 올라 대사성과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584년(선조 17) 부제학을 거쳐 외직인 전라도관찰사와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 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동지의금부사로 왕을 호종하여 서울로 환도한 후 한성부좌윤과 혜민서 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거쳤다.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선조 32)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우옹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宣祖)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73년에는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정치 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 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 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와 강학(講學), 경신(敬身), 극기(克己), 친군자(親君子), 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는 학령(學令), 독법(讀法), 치경행재(置經行齋), 택사유(擇師儒), 선생도(選生徒), 공사(貢士), 취사(取士)의 「학제 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1579년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기도 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선조 28)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 칠조」, 7월 「시무 사조」, 9월 「시무 팔조」, 이듬 해 「시무 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을 내용으로 하는 「중흥 요무 팔조(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붕당 정치의 혼란이 심해지자 동인과 서인의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에 속하였다. 서인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그들의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김우옹은 조식과 이황의 학통을 동시에 이어받은 선비로 분류되며 생의 후반기에는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이황의 문인들과 교우가 두터웠기 때문에 이황의 문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정구와 함께 성주의 학문적 분위기를 쇄신하여 성리학의 고장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후손이 성주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김우옹정구의 호가 각각 동강한강(寒岡)이어서 사람들이 두 사람을 ‘양강(兩岡)’으로 불렀으며, 성주는 ‘양강의 고장[兩岡之地]’으로 불렀다.

저서로 1661년(현종 2) 간행된 문집인 『동강집(東岡集)』이 있다. 그 외 심통성정론을 소설화한 한문 소설 「천군전(天君傳)」을 지었고,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였고, 편서로는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당(晴川書堂),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723년(경종 3)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집하한 동강 김우옹 신도비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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