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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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孟性 |
영어공식명칭 | Gim Maengseong |
이칭/별칭 | 선원(善源),지지당(止止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우인수 |
출생 시기/일시 | 1437년 - 김맹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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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76년 - 김맹성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78년 - 김맹성 고령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482년 - 김맹성 유배 생활 방면 |
몰년 시기/일시 | 1487년 - 김맹성 사망 |
거주|이주지 | 김맹성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해평 |
대표 관직|경력 | 이조정랑 |
[정의]
조선 전기 성주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선원(善源), 호는 지지당(止止堂). 할아버지는 김문상(金文尙)이고, 아버지는 김준례(金遵禮)이다. 어머니는 순흥 안씨 안순(安純)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맹성(金孟性)[1437~1487]은 초기 사림파(士林派)[산림에 묻혀 유학 연구에 힘쓰던 문인들의 한 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52년(문종 2) 16세 때 6세 연상의 김종직을 따라 개령 감문산(甘文山)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그 뒤 다시 김종직을 따라 김천 직지사(直指寺)에 가서 공부하였다. 자질이 총명하여 스승 김종직의 사랑을 받았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과 도의로 사귀었는데, 김굉필은 김맹성보다 17세가 적었으므로 스승과 벗의 중간으로 공경하고 대우하였다.
독서와 저술을 좋아하였고, 특히 시를 즐겨 날마다 읊조리는 것을 일로 삼았다. 집안사람들이 산업에 종사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천성이 술을 잘 마시지 못하였으나 손님이 오면 기뻐하며 술을 가져다 놓고 취하였다. 얼큰하게 취하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으며, 부귀와 영리에 대하여 욕심이 없었고, 마음이 깨끗하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팎으로 자손과 친척들이 조정(朝廷)에 가득하니, 혹 벼슬하기를 권하여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찍부터 높은 명망이 있었으므로 변함이 없이 세상에 뜻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였다. 과거 시험에 연이어 몇 차례 실패한 다음에 가천에 지지당(止止堂)을 짓고 소일하였다.
1476년(성종 7) 40세 때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헌납(獻納)으로 재직하였다. 1478년(성종 9) 도승지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탄핵한 죄로 고령에 유배되었다가 1482년(성종 13)에 풀려났다.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과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향리에 정사(精舍)를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그 학덕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많았다.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잘 지켜 실천궁행(實踐躬行)[실제로 몸소 이행함]할 것을 강조하고, 관리가 되어서는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재목이 되라고 가르쳤다.
성주군 지사면 마산촌[현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에 김맹성의 고택이 있었다. 고택에는 여러 시판이 걸려 있었는데, 김종직의 시판을 지킨 것은 유명한 전설로 남아 있다. 김맹성은 죽은 뒤에 첩의 꿈에 나타나서, “빨리 문미의 현판들을 거두어라”라고 하였다. 첩이 잠에서 깨어나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모두 거두어 숨겼는데, 며칠 뒤에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들이닥쳐 김종직의 시판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것은 유자광(柳子光)이 사화를 일으키면서 관청과 사가(私家)에 있는 김종직의 시판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게 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김종직의 시판이 무사할 수 있었다.
[학문과 저술]
성주 가천에서 생활할 때 거처인 지지당을 두고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지지당한영(止止堂閒詠)」이라는 제목으로 오언 율시, 칠언 율시, 칠언 절구 각 1수를 지었고, 「제지지당(題止止堂)」이라는 제목으로 칠언 율시를 지었으며, 「지지당즉사(止止堂卽事)」라는 제목으로 오언 절구를 짓기도 하였다. 특히 김맹성이 고향 가천을 대상으로 지은 「가천죽지곡(伽川竹枝曲)」 9수 연작시는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죽지곡이란 본래 당나라 유우석(劉禹錫)[772~842]이 기주좌사(夔州刺使)로 있을 때 건평(建坪) 지역 아녀자들이 부른 민가(民歌)를 채집하여 칠언 절구 9수 연작시를 지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특정 지역의 민풍습속(民風習俗)과 토속쇄사(土俗瑣辭)를 집중적으로 읊은 것이라는 점에 핵심적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1287~1367]과 민사평(閔思平)[1295~1359]이 처음 「가천죽지곡」을 응용하여 각각 「소악부(小樂府)」를 지은 바 있다. 이후 문단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조선 성종(成宗) 이후 사림파 인물들이 등장하여 지방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면서 다시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이 밀양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응천죽지곡(凝川竹枝曲)」 9수 연작시를 짓고, 김종직의 제자 유호인(兪好仁)이 함양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함양남뢰죽지곡(咸陽灆雷竹枝曲)」 10수 연작시를 지은 것이 바로 그런 예이며, 김맹성의 「가천죽지곡」 또한 바로 이의 연장선상에서 창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천죽지곡」은 성주 가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작시라는 점에서는 물론, 조선 후기에 널리 창작된 죽지곡(竹枝曲) 혹은 죽지사(竹枝詞)라 불리는 작품 계열의 선편을 보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전해지는 저서로 『지지당시집(止止堂詩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