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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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宗市-傳統-祭登谷里洞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등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정희 |
[등곡리 마을의 역사]
등곡리는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2.5㎞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노고봉(老姑峰)[305.1m]이 우뚝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금강이 굽이쳐 흐른다. 강 건너에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금탄동이 자리하며, 산 너머에는 달산리가 있다.
등곡리는 행정구역상 1·2·3리로 나뉜다. 예부터 노고봉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등곡1리는 조은들[존들]로 불리었다. 등곡2리에는 등골[등곡], 훼쟁이, 갓점, 텃골 등 여러 자연마을이 있다. 등곡3리는 본래 마을이 없다가 1970년대에 새로 생겨났다. 현재 충광농원이 있다.
‘조은들’은 한자로 조어대(釣魚臺), 조은(造隱·釣隱)을 뜻한다. 여기서 ‘조은(釣隱)’은 ‘낚시하기에 좋은 터’라는 의미이다. 예부터 금강이 마을 가까이 있어서 낚싯대를 드리우기에 좋은 곳이었다. 마을 어귀에 우뚝 솟은 태봉이 조어대 자리로 안성맞춤이라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등곡리는 광산촌(鑛山村)으로 유명하였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노고봉 일대에 상당량의 중석(重石)이 매장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엽에 시작된 중석광산 개발은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광맥(鑛脈)이 부강리, 문곡리, 금호리 일대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마을 어귀에 ‘내선광업소(內鮮鑛業所)’ 사무실이 있었고 광복 무렵에는 ‘청풍 광업소’로 상호가 바뀌었다. 1909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광산 개발도 가속화되었다. 철도 교통 발달로 대량의 광물 운송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조은들은 광산촌으로 변하였다. 주민들 중 80% 이상이 광업에 종사하였다. 부강리·금호리·문곡리를 비롯하여 강 건너 금남면에서도 중석을 캐려는 인부들이 몰려들었다.
노고봉 밑에 좁은 골짜기를 따라서 마을이 형성되어 농경지가 적은 편이었다. 양질의 논밭은 전부 철둑 너머인 지금의 등곡3리 충광농원 일대에 있었다. 1970년대까지 주민들은 대부분 남의 땅을 소작하거나 광산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나무를 팔러 다녔다.
부강장의 상권이 커지면서 땔감 수요가 증가하였고, 장터 일대 마을들에서 하여 온 땔감이 상인들에게는 요긴하였다. 서로 나무를 해서 팔다 보니 산은 금세 벌거숭이가 되었다. “산 위에서 인절미를 굴려도 티끌 하나 안 묻는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남자들은 땔감을 더 많이 하려고 강 건너 매방산에까지 다녀왔다. 여자들은 가까운 불당골, 파랑골, 신적골, 저당골[저낭골] 등지를 다니면서 땔감을 하였다. 주민들은 끼니가 간 데 없던 가난한 시절에 ‘나무장사’로 가난을 이겨내었다.
[등곡리 마을과 탑제]
등곡1리 조은들은 크게 두 마을로 나뉜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있는 마을회관 근처가 아랫말이다. 마을 안길을 따라서 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2기의 탑이 보인다. 탑을 경계로 골짜기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 윗말이다.
윗말 어귀의 길가에 남북 방향으로 탑 2기가 세워져 있다. 마을에서는 ‘윗탑’ 또는 ‘윗말탑’이라고 부른다. 두 탑은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다. 과거에는 윗말탑 부근으로 길이 나 있었다. 소나무 숲 속에 탑이 있어서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북쪽 탑은 온전한 형태이지만 남쪽 탑은 산비탈에 있어서 한쪽 면이 허물어졌다.
주민들은 오래 전에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탈 없이 태평하게 지냄]을 위하여 크고 작은 잡석(雜石)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탑에는 마을 사람들의 오랜 염원이 깃들어 있다. 정확한 조성 시기도 알 수 없고, 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잡석을 기단부에서부터 원뿔형으로 정성껏 쌓아올려 상부에는 머릿돌을 얹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머릿돌에 해마다 백지 고깔을 새로 씌운다. 마치 웃어른에게 새 옷을 지어 드리는 것과 같다.
아랫말 어귀에도 탑 1기가 세워져 있다. ‘아랫탑’ 또는 ‘아랫말탑’으로 불리며 산 밑 도로변에 있다. 도로 건너에는 개울[川]이 흐른다. 탑 뒤에는 소나무 고목이 있다. 마을에서는 탑도 중요하게 여기면서 소나무도 정성껏 위한다.
윗말과 아랫말 어귀에는 각각 탑이 세워져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탑과 고목(古木)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누구도 함부로 탑을 허물거나 나뭇가지 하나 벨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지골[신벌(神罰)]을 맞는다고 믿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 자시(子時)를 기하여 탑제를 모신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하여 정성을 들였다. 광복 무렵에도 탑제는 정성껏 지내었다. 6·25전쟁 때도 피해가 전혀 없었다. 주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탑제를 지내 마을이 평안하다고 믿고 있다.
[등곡리 마을과 낙화 내리기]
낙화를 한자로 옮기면 ‘불(火)’이 ‘내린다(落)’라는 뜻이다. 조은들에서는 정월 열나흗날이면 탑제를 지내기 전에 낙화봉에 불을 붙여서 액을 막았다. 새해 첫 보름달이 떠오르고 하늘 높이 매단 낙화봉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낙화의 어원은 하늘에서 잔잔하게 불[또는 불빛]이 내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현대판 폭죽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화려하게 터지지 않는다.
낙화는 뽕나무 숯을 천에 싸서 원통형으로 만든 것이다. 원통형 모양 때문에 ‘낙화봉’이라고도 한다. 천에 싼 숯이 밖으로 쏟아져 내리지 않도록 짚으로 한 가닥씩 가지런히 묶는다. 짚이 풀어지면서 작은 불씨들이 천천히 쏟아져 내리도록 만들었다.
낙화를 만드는 풍습은 마을 제사의 오랜 전통이다. 탑제를 모시기 전에 반드시 낙화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마을 안팎으로 드는 액을 막기 위함이다. 마을 사람들은 밤새도록 낙화에서 불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을의 안과태평을 빌었다.
주민들은 낙화의 불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낙화 내린다” 또는 “꽃 내린다”라고 하였다. 처음 낙화를 본 사람들은 진짜 꽃이 내리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아름답다. 마을에서는 ‘낙화놀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낙화 내리기’라고 한다.
낙화봉은 지름이 15~20㎝ 되는 원기둥 형태이며, 총 길이는 1m 남짓 된다. 과거에는 윗말과 아랫말에서 시합을 하느라고 낙화봉을 더욱 길게 만들었다. 낙화줄도 두 군데에 나누어 맸다. 윗말에서는 윗탑 근처에서 건너편 태봉까지, 아랫말에서는 현(現) 마을회관을 사이에 두고 앞산부터 하봉산 자락까지 줄을 맸다. 각각의 줄에는 10~20개 정도의 낙화봉을 매달았다.
산과 산 사이에 길게 줄을 늘였기 때문에 약 100~120발[1발 150㎝ 기준] 정도 짚을 꼬았다. 낙화줄은 나쁜 것을 막는 금줄 기능도 한다. 따라서 금줄처럼 왼새끼로 꼰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사이를 띄어서 한 가닥씩 짚을 빼는 것도 금줄과 같다. 여러 사람이 완성한 낙화줄은 사흘 전에 미리 쳐 놓는다. 그래야만 줄이 늘어나서 낙화봉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이윽고 정월 열나흗날 저녁이 되면 남자들 여럿이 줄에 낙화봉을 달고 불을 붙인다. 줄에 단 낙화봉 모두 불이 잘 붙었는지 확인한 후에 양쪽에서 두세 명이 낙화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낙화봉이 새벽까지 오래도록 타서 없어져야만 길조(吉兆)로 여겼다. 마을 사람들은 숯이 타면서 쏟아져 내리는 불빛 덕분에 마을로 드는 재액이 소멸된다고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낙화가 잘 내리길 응원하기도 하였다. “웃말 이겨라!”, “아랫말 이겨라!” 하고 외치는 소리가 온 마을에 퍼졌다. 낙화를 둘러싼 두 마을의 경쟁은 전쟁놀이를 연상시켰다. 청년들은 서로 상대편의 낙화줄을 끊으러 가기도 하였다. 낙화봉이 완전히 타는 데 10시간 남짓 걸렸다. 낙화봉을 길게 만들수록 오래 타기 때문에 이튿날 오전까지 불이 내릴 때도 있었다.
[등곡리 마을의 똥수깐 태우기]
동제는 탑제를 지내는 것을 중심으로 낙화 내리기, 똥수깐 태우기까지 포함된다. 곧 똥수깐 태우기도 등곡리 동제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여기서 ‘똥수깐’은 나뭇단과 이엉을 엮어서 원뿔형으로 지은 막집을 일컫는다. 정월 보름날 흔히 볼 수 있는 ‘달집’과는 형태도 다르고 의미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똥수깐은 낱말 뜻 그대로 변소[측간]이다.
마을에 따라서는 거리제를 지내면서 마을 어귀에 있는 어떤 집 변소를 불 지르는 풍습이 있다. 변소를 태우면서 나는 굉음과 불길은 마을 어귀를 낮처럼 환히 밝힌다. 밝은 빛 때문에 불을 무서워하는 잡귀들은 혼비백산하여 마을 밖으로 달아난다고 믿었다. 똥수깐 태우기는 거리제의 마지막에 행하는 잡귀 구축(驅逐)[어떤 세력 따위를 몰아서 쫓아냄]을 위한 ‘변소 불지르기’인 셈이다. 마을 어귀에 적당한 변소가 없다면 임시로 나무와 짚 등을 써서 허름한 막사를 짓고 불을 지르기도 한다. 조은들에서도 허름한 막사 형태의 똥수깐을 태움으로써 잡귀를 구축하고 제액을 막고자 하였다.
근래에는 ‘똥수깐 태우기’로 부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똥수깐’은 더럽고 악취가 나는 곳으로 여겨져서 낱말 사용을 꺼린다. 대중 매체의 영향으로 ‘똥수깐 태우기’라는 명칭은 거의 사라지고 대신 ‘달집 태우기’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공통된 경험을 되짚어 보면 ‘똥수깐 태우기’라는 명칭이 오래도록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이면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똥수깐에 불지른다”, “똥수깐 태운다” 하고 외치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0년대 이전까지 윗말과 아랫말에서는 각각 똥수깐을 지었다. 대개 낙화줄 부근의 넓은 논 한가운데에 지어 놓았다. 굵은 나무로 원뿔형의 기둥을 세우고 움집처럼 기둥 주위에 이엉을 덮었다. 맨 위에는 용구새[용마름]도 씌웠다. 안에는 잘 타는 마른 나무와 짚단을 채워 넣었다.
오늘날은 소나무나 짚 대신 대나무를 사용한다. 불씨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변을 정리하고 나뭇가지를 원뿔형으로 차곡차곡 쌓아서 형태를 만든다. 똥수깐의 전체 높이는 1.5~2.0m 되며, 둘레에 금줄을 두르고 소원을 적은 길지(吉紙)[사람에게 복되고 좋은 일을 가져다준다는 종이]를 끼운다.
정월 열나흗날 해가 지면 마을은 역동적으로 변한다. 낙화에 불이 붙으면서 본격적인 불놀이가 시작된다. 한쪽에서는 낙화가 내리고 한쪽에서는 똥수깐이 활활 타오른다. 풍물패가 흥을 돋우면서 윗말·아랫말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여진다.
[등곡리 마을의 동제의 의미]
역사적 유래는 분명하지 않지만 등곡리 동제의 기본 구성 요소는 낙화 내리기-똥수깐 태우기-탑제이다. 민속적 가치와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낙화 내리기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세시(歲時)[한 해의 절기, 달, 계절 등에 따른 때]로 행하는 달맞이[망월(望月)], 불[화(火)]과 관련된 풍습에서 유래한다. 곧 ‘달맞이-불놀이-불싸움 문화복합’의 한 유형이다.
정월 열나흗날 마을 뒷산이나 인근의 산으로 횃불을 들고 달맞이를 간다. 횃불을 달을 향하여 돌리거나 땅에 꽂아 놓은 채 소원을 빈다. 어떤 마을은 원추형으로 달집을 세워 놓고 태우면서 한 해 평안을 기도한다. 이른바 달집 태우기이다. 아이들은 달집 태우기 전후로 잔솔가지 등을 깡통에 담아 불을 지펴 돌리면서 쥐불놀이를 한다.
등곡리에서는 낙화봉에 불을 붙이고 낙화가 온전히 내리기 시작하면 잠시 후 똥수깐에 불을 지르는 풍속이 있다. 똥수깐은 변소를 뜻한다. 마치 움집처럼 나무 장대와 볏짚을 사용하여 원뿔대 형태로 꾸몄다. 똥수깐의 외형을 모방한 것이다. 똥수깐 역시 오래도록 잘 타야만 제액(除厄)[액(厄)을 예방하고 물리치기 위한 각종 주술 행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안에 청솔가지를 비롯하여 잘 타는 땔감 등을 잔뜩 넣었다.
낙화에서 불빛이 쏟아지고 똥수깐에 불길이 솟아 오르면 윗말과 아랫말에서는 서로 “윗말 이겨라!”, “아랫말 이겨라!” 하고 외쳤다. 똥수깐의 불길이 거세게 일고 낙화봉이 오래도록 잘 타는 마을이 이기는 셈이다. 정월 열나흗날 밤이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는 불놀이 또는 불싸움의 한 유형이다.
낙화 내리기와 똥수깐 태우기로 모든 제액을 물리친 후에야 비로소 탑제를 모신다. 돌탑은 윗말 어귀에 2기, 아랫말 어귀에 1기가 있다. 돌탑의 머릿돌 위에는 종이로 접은 고깔을 씌워 놓았다. 돌탑에 신격(神格) 또는 불성(佛性)을 부여하는 상징물이다.
탑제는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을 골라 제관으로 선정하여 제사를 모신다. 기본적으로 유교식 제사로 간소하게 치른다. 탑제를 모시는 시각은 보름날 자정이다. 묵은해와 새해의 과도기가 끝나고 진정한 새해인 대보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시간이다. 제관 일행은 윗말탑에서 정성을 드린 후에 아랫말으로 내려와 똑같이 정성을 드린다.
1980년대 초엽까지 등곡리 동제는 변함없이 치러졌지만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마을의 대내외적 환경이 변하였다. 낙화 내리기와 똥수깐 태우기는 점차 흐지부지되다가 폐지되었고 탑제만 모시게 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 귀촌인이 늘고 옛 전통을 되살리려는 뜻이 모아져서 ‘탑제-낙화 내리기와 똥수깐 태우기[달집 태우기]’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