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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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山申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91년(성종 22) - 신준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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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60년(명종 15) - 신준미 사망 |
본관 | 평산신씨 본관 - 황해도 평산군 |
입향지 | 평산신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
세거|집성지 | 평산신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감성리 |
묘소|세장지 | 신준미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
묘소|세장지 | 영모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
성씨 시조 | 신숭겸 |
입향 시조 | 신준미 |
[정의]
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신준미를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평산신씨는 사간공파 신준미가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가 발발하자 공주로 낙향하여 금남면 영곡리에 거주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연원]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본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전라도 곡성(谷城) 출신이다. 태봉의 장군으로 있다가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功)을 세웠다. 태조(太祖) 왕건에게 평산에서 신(申)씨 성을 사성(賜姓)[임금이 공신에게 성(姓)을 내려주던 일] 받았다. 신숭겸이 왕건과 동행한 평산에서 뛰어난 사냥 실력을 보였으며 이에 감탄한 왕건이 신숭겸으로 하여금 평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
신숭겸은 927년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으며 사후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追封)[죽은 뒤에 관위(官位) 따위를 내림]되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다.
[입향 경위]
금남면 영곡리 평산신씨는 신호(申浩)를 파조로 하는 사간공파(思簡公派)이다. 신호는 공양왕 때 지신사(知申事)로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 신호를 전리판서에 임명하였으나 불사(不仕)[벼슬을 주어도 나서서 하지 아니함]의 뜻을 밝히고 고향인 평산으로 돌아가 자손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고 좋은 벼슬을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훗날 부음을 전해 들은 태조가 슬퍼하며 호조판서를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하고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로 사간(思簡)을 내렸다.
금남면 영곡리 입향조는 신준미(申遵美)[1491~1562]이다. 신준미는 1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광조(趙光祖)로부터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예문관봉교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奉敎兼春秋館記事官)을 지냈다. 신준미는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관직을 버리고 금남면 영곡리로 낙향하였는데 영곡리와의 연고와 입향 사유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신준미는 사화가 진정되고 조정에서 1545년(명종 원년)에 전적(典籍)[조선시대에 성균관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정6품의 벼슬]으로 속하여 복귀하기를 간청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였다고 한다. 신준미가 금남면 영곡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마을에 전씨(全氏)가 살았다. 또한 신준미가 입향하기 전에는 영곡리를 병암골이라 불렀는데 이후에는 신준미가 한양에서 왔다 하여 한양골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현황]
평산신씨 사간공파는 금남면 영곡리와 감성리 외에도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 등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금남면 영곡리에 신준미의 묘소와 묘비가 있으며 오강팔정(五江八亭) 가운데 하나인 한림정(翰林亭)이 있다. 또한 평산신씨 재실(齋室) 영모재가 있는 자리는 신준미, 신점(申點)[1530~1601], 신임정(申林頲)[1554~1636] 등 3인을 제향하는 병암서사(屛岩書社)가 있던 곳이다. 병암서사는 1871년(고종 8)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