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E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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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경윤 |
❚ 양성직 씨와 장승의 인연
마을 청년 중에서 일곱 번째로 젊은 양성직(52) 씨는 주곡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남매 중 첫째인 그는 어린 나이에 3명의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책임져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터는 목수였던 작은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일을 하러 다녔다. 그 당시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인 장승 깎는 일을 작은 아버지가 담당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양성직 씨도 장승 깎는 일을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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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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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는 나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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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운반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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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가 드러나는 장승
처음 장승 깎는 일을 시작한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작은아버지께서는 “내가 아파도 살 날 까진 이일을 하겠지만 그 다음에는 니가 해라” 라는 말을 하셨다.
즉, 작은 아버지에게 하던 일을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도 동네 사람 중에 가장 재주가 좋아 30여년이 넘도록 장승 깎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
❚ 요즘에 누가 힘든 일을 하려고 하나?
양성직 씨는 장승깎기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장승으로 쓰일 나무는 반드시 조선소나무를 써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나무를 이제까지 써 본 적도 없고 쓰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무에 비해 오래가고 껍질이 얇아 잘 깎이는 조선소나무라야 장승으로 세워질 자격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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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베는 양성직씨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으로 쓸 것과 짐대를 만들 나무까지 총 네 그루를 선택하고 나무를 베기 전에 포, 술을 놓고 점찍은 나무 앞에서 제를 올린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얼마 없다.
“그냥 나 혼자 하는 거지 내가 나무 고르고, 베고 다 하니까 내가 책임을 지고 하는거야, 동네사람들한테 굳이 알릴 필요도 없고... 무사히 잘 넘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겨 별거 없어”라며 양성직 씨는 묵묵히 말한다.
나무를 벨 때에는 엄숙하고 조심스럽게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일에만 집중을 한다. 이 일은 양성직 씨 자기 자신이 아니면 마을에서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더욱 정성을 들이며,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이자 양성직 씨 자신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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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을 치며 흥을 돋구는 양성직씨
열일곱 살 때에 작은아버지가 장승 깎는 모습을 보고 곁에서 심부름하는 일부터 시작해 시간이 지나면서 보조 역할을 하였고 첫 번째 작품이 나온 것은 24살이던 1980년이었다.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만족스러워 했다. 또한 자신이 만들었다는 성취감에 남몰래 뿌듯함을 느끼며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식구들 역시 고향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아버지, 남편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혹시 아들이 장승을 깎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요즘 애들 누가 이런 거 하려고 해,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하고 싶다고 해도 말려야지, 얼마나 좋은 일, 할 일이 많은데... 이건 직업이 있는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일이야, 나같이 농사 조금 짓고,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나 가능하지 힘들어. 일에 지장을 초래하면서까지 하게 할 생각은 없어.”
양성직 씨는 자신의 눈에는 아들이 그렇게 자질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생각이 있다고 하면 지원은 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 무형문화재를 향한 기다림
양성직 씨는 벌써 30여 년간 마을의 장승 깎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1992년에는 백제문화제의 한 프로그램이었던 ‘장승 깎이’ 대회에 출전해 당당히 수상을 하는 등 여러 대회에 나가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주민들과 논산시청, 상월면사무소에서도 관계자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관계자들은 관련서류를 끊임없이 제출하고, 양성직 씨는 여러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으로 수상을 하는 등 양성직 씨의 인기가 대단하다.
1992년 첫 대회는 백제문화제(제38회) 였다. 처음 참가해 약간의 긴장감과 떨림이 있었지만 당당히 장려상을 수상했다. 또 1993년 전국 백제문화제(제39회) 장려상, 1999년·2000년 칠갑산 대장군상(청양군수)등 계속해서 많은 상을 수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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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직씨가 받은 칠갑산 대장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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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대장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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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회 백제문화제 장려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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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회 백제문화제 장려상 수상
또한, 현재 주곡리의 장승이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해마다 제작하는 기능보유자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장승을 만들고 있지만 혼신을 다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 해 내는 양성직 씨야말로 무형문화재감이 아닌가 생각한다.
재주 많은 사람에게 일도 끊이지 않는 법이다. 양성직 씨 또한 마을의 이런저런 일들에 관여하느라 쉴 틈이 없다. 그래도 장승제가 다가오면 다른 일은 다 제쳐두고 오직 장승제 생각만 한다. 마음을 정결히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나무를 깎는다.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며 남이 하지 않는 일, 내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란 자긍심을 가지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이상해, 장승 앞에만 가면 화가 나도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웃고 있어, 신기하게... 마음의 정리가 된단 말이야, 남들이 보면 그 앞에서 혼자 웃고 있어서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진심이니 그거가지고 누가 뭐라고 할 거야, 그게 자연스러운 거, 솔직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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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일꾼 양성직씨의 손
장승에 대한 깊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일로 다른 사람에게 장승을 맡겼던 기억이 있다. 15년 전 쯤, 대전으로 이사했을 때였다. 장승제 참여를 약속 하고서도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해 다른 사람이 대신해 장승을 깎았다. 거의 완성이 되어 갈 무렵, 장승의 눈 한쪽이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점점 장승제 지낼 시간은 다가오고 그렇다고 다시 만들기에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할 수없이 떨어진 장승의 눈을 못으로 박아서 세우고 장승제를 지냈다.
예나지금이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눈에 못을 박으면 못 쓴다는 옛말이 있듯이 보기에도 매우 흉했다. 그리고 그해에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로 들어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한쪽 눈이 실명이 되고 죽었다고 한다. 그 후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장승 깎는 일을 도맡아 하시는 양성직 씨는 더욱더 정성을 다한다고 한다.
❚ 팔방미인이라.
돌아가시기 전 양성직 씨의 아버지도 목수 일을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호기심도 가득했던 양성직 씨는 3~4세 때 일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쓰시던 연장을 가지고 놀았다는 이유로 3m가 넘는 자가 5조각이 날 정도로 맞았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물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잖어... 우리같이 연장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더해. 그때는 원망스럽기만 하고 몰랐었지” 아직도 돌아가시기 전의 무서웠던 아버지가 생생하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들 슬퍼서 울고 있는데 아버지의 묘자리에 가서 “이제 우리 아부지 죽어서 안 맞아도 된다.”며 웃으면서 소리를 지른 일은 마을 사람들도 생각난다고 한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라 철이 없었지 울어도 모자랄 판에 너무 많이 후회 돼.”
목수 일 하시던 아버지의 피를 지금껏 물려받아 장승 깎는 일 뿐만 아니라 집 고치는 일 등 손재주를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작은 아버지를 따라 일을 하러 다니는 시간 말고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지게나 쟁기 등을 만들어 팔았다. 뭐든지 손으로 만드는 일은 재미있다고 하는 그를 마을 어른들은 ‘풀어 놓은 개처럼 이곳저곳 잘도 돌아다닌다.’라고 짓궂게 놀리기도 하지만 지금은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주곡리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팔방미인으로 통한다.
양성직 씨는 주곡리의 전통있는 가문인 청주양씨가의 후손으로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사주팔자를 보니 고향을 떠나야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사주풀이가 나왔다. 주곡리에서 농기계 사업을 하다가 점점 기계가 일반화되면서 사업에 실패하면서 운명 탓이었는지 1990년대에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대전에 식구들을 정착시킨 후 자신은 얼마 있지 못해 다시 주곡리로 혼자 돌아 왔다. 물론 식구들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그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대전 집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한번 떠나서 느껴본 고향에 대한 애틋함은 전보다 더욱 깊어졌다. 그는 여기를 떠나면 죽는 줄 알고 살고 있다고 하며 평생 고향을 지키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요즘에는 농사일이 바빠서 자주 대전 집에 못가서 오히려 자식들이 아빠를 보러 대전에서 2주에 한번씩 오는데 항상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뿐이다.
마을에서 많지 않은 청년 중에서도 일곱 번째로 젊은 사람인데다 이런저런 재주까지 타고났으니 주곡리에서는 손꼽히는 일꾼이다. 마을의 온갖 대소사는 물론이고, 이웃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정도다. 마을의 어느 집 하나도 앙성직 씨의 손을 안 거친 곳이 없다. 주민들은 형광등 갈아 끼우는 일, 보일러 고치는 일, 심지어는 자동차에 열쇠를 꽂아 놓고 내려서 문이 잠겨도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양성직 씨부터 찾는다.
“차라리 모르면 속이 편할 텐데, 하나하나 다 아니까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고...” 동네사람이 아니라 분가한 한 가족 같다.
아직도 이것저것 아직도 해 온 일보다 해 보고 싶은 일이 더 많다는 그는 주곡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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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는 양성직씨 모습
[정보 제공자]
양성직(1956년생, 주곡리 주민)
양화남(1942년생, 동계 총무)
이방헌(1926년생, 주곡리 주민)